네넴 R3 [암흑]
아침, 모두가 잠에서 깨지 않은 조금 이른 시각. 네넴은 작은방에서 나와서 저택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주위에 널려 있는 고철 쓰레기와 어디선가 튀어나오는 나사 등을 정리하는 것이 네넴이 맡은 일이었습니다. 어른도 있었지만, 어린 네넴이 함께 청소하는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네넴을 지켜보는 어른은 있었지만, 네넴이 시선을 마주치려 하면 얼굴을 살짝 돌리며 외면했습니다.
5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병으로 잃게 된 네넴을 어머니의 오빠, 즉 외삼촌이 사는 이 저택에서 맡아 기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외삼촌의 부인, 즉 외숙모는 그런 네넴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네넴을 맡아 기르려는 외삼촌에게 말했습니다.
"허드렛일을 하는 시종으로 쓸 생각이라면 이 저택에 데려다 놓아도 좋아."
이 저택은 외숙모가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삼촌도 외숙모가 하는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던 네넴은 외숙모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봐, 내가 돌아오면 마중을 나오란 말이야!"
저녁에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등 뒤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외삼촌과 외숙모의 아이인 쉐리였습니다.
"쓸모없는 아이네! 어머님께 다 일러바칠 거야!"
쉐리는 네넴에게 화를 내며 학교에서 쓰는 가방을 집어 던지고 자기 방으로 갔습니다. 네넴은 쉐리가 집어 던진 가방을 주워들고 쉐리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큰 저택에 네넴의 발소리만이 찰캉찰캉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콘크리트와 금속으로 만들어진 바닥을 하얀색 전기 조명이 비추고 있었습니다.
"쉐리 아가씨, 가방을 가지고 왔습니다."
"늦었잖아!"
쉐리의 방으로 가방을 가져다주었지만, 역시 혼나고 말았습니다.
"정말 쓸모없는 쓰레기라니까."
쉐리는 가방을 낚아채고 철로 만들어진 방문을 닫았습니다. 철컹하는 큰 소리가 네넴의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이런 생활이 네넴의 일상이었습니다. 비슷한 또래의 쉐리는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네넴은 학교에 가지도 못하고 일만 할 뿐이었습니다. 이럴 때마다 네넴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만 남겨두고 저세상으로 가버린 것을 원망하다가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 네넴이 평소처럼 청소를 하고 있는데 저택의 현관이 어수선해졌습니다. 외삼촌과 외숙모, 그리고 쉐리가 잔뜩 꾸미고 나온 모습이 보였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현관을 바라보니 외삼촌과 비슷한 또래의 남녀와 네넴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가 외삼촌 가족에게 환대를 받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바쁜 와중에도 와줘서 고맙네."
외삼촌과 남자는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굉장히 사이가 좋은 것 같았습니다.
"자, 그레고르, 제대로 인사를 해야지."
여자에게 등을 떠밀린 남자아이가 외삼촌 가족 앞에 섰습니다.
'큰 눈이 무척 예쁜 애구나. 하염없이 바라만 봐도 좋을 것 같다.'
네넴은 그 남자아이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레고르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자, 쉐리도 인사해라."
그레고르가 인사를 하자, 이번엔 쉐리가 외삼촌의 말씀을 듣고 앞으로 나왔습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쉐리 입니다..."
항상 네넴에게 고함만 치는 쉐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채로 더듬거리며 고레고르 일행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항상 거만하게 구는 쉐리가 저렇게 긴장해서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약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의 모습은 청소를 마저 해야 해서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남자아이의 예쁜 눈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이런 일을 처음 겪어보는 네넴은 쭈뼛거리면서 청소를 계속했습니다. 낮에 뒤뜰에서 고철 쓰레기를 줍고 있는데 그레고르라고 불리던 남자아이가 다가왔습니다. 두리번거리면서 어딘가 불안한 듯한 시선으로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신가요오?"
저택이 너무 넓어서 미아가 된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네넴이 그레고르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외숙모나 쉐리에게 들키면 혼날 수도 있었지만, 남자아이와 잠시나마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네넴은 자기도 모르게 말을 걸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아, 너는...?"
그레고르는 자신이나 쉐리와 같은 또래의 여자아이가 초라한 모습으로 마당 청소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란 것 같았습니다.
"네넴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일하고 있어요오."
네넴은 놀라는 그레고르에게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그레고르라고 해. 잘 부탁한다."
그레고르는 놀란 기색이 사라진 예쁜 얼굴로 네넴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악수를 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네넴은 그레고르의 하얀 손을 잡았습니다.
그 후로, 그레고르가 가끔 저택에 놀러 올 때마다 외삼촌이나 외숙모, 쉐리의 눈을 피해 숨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만나는 장소는 처음으로 두 사람이 만났던 뒤뜰이었습니다. 그레고르가 해주는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어서 네넴은 생글생글 웃으며 그레고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네넴은 매일 청소를 하는데도 금세 더러워지는 저택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을 만큼 그레고르가 오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런 즐거운 날들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쉐리가 그레고르를 찾으러 뒤뜰까지 온 것이었습니다.
"뭐야! 네넴. 네 주제에 감히!"
쉐리가 눈을 치켜뜨고 화를 냈습니다. 쉐리의 뒤에 검은 무언가가 자욱하게 서려 있었습니다. 어느 틈엔가 햇빛이 사라지고 주위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네넴, 도망치자!"
그레고르가 네넴의 손을 잡아당기며 일어서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레고르가 분명히 잡아당겼음에도 불구하고 네넴은 그 장소에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레고르의 손에는 장갑처럼 변한 네넴의 손 가죽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건..."
네넴은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손이 저택의 마루나 벽과 같은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미안, 나는 또다시 당신을 구하지 못할 것 같아... "
그레고르가 슬픈 목소리로 네넴에게 말했습니다.
"그레고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미안, 미안해. 다음번에는 꼭 구해줄게."
그레고르는 눈물을 흘리며 네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네넴의 주위를 검은 그림자가 뒤덮었다.
"다음에야말로 반드시 구해줄게. 내... 여동..."
검은 그림자에 휩싸이는 네넴의 귀에 그레고르의 비통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려, 기다리라고. 그레고르!"
이윽고 네넴의 시야가 완전히 암흑으로 물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아무도 없어? 누가 나 좀 여기서 내보내 줘!"
네넴은 필사적으로 외쳐 보았지만, 그 목소리는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었다.
"엄마, 그레고르. 이러면 안 되잖아. 내가 말한 대로 똑바로 해야지."
갑자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예전에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 아악..."
소녀의 목소리가 네넴의 귓가에 들린 순간, 강한 두통에 휩싸였다. 심장 박동이 네넴의 의식을 배앗을 듯한 기세로 고동치며 네넴을 잠식하고 있었다.
"아하하하하하! 있잖아, 엄마. 내 얘기 좀 들어봐! 이번에는 나도 같이 놀기로 했어! 기쁘지?"
"그만! 그만해!"
네넴이 외쳤다. 모든 기억이 모조리 덧칠되어 사라져버리는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부모를 잃고 몸을 의탁한 곳에서 학대를 받았던 자신. 멋진 남자를 만나고, 사랑에 빠져서 구원을 받았던 자신. 그 기억들이 소녀의 웃음소리와 고동치는 묵직한 통증 속에서 지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살려줘!!"
"엄마...?"
벌떡 일어난 네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사랑스러운 딸, 스테이시아였습니다. 악몽에 시달리던 네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엄마, 괜찮아?"
"어...? 아, 미안해. 스테이시아. 놀랬지?"
"아니야, 엄마가 괜찮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해."
스테이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네넴을 꼭 껴안았습니다. 네넴은 그런 스테이시아를 끌어안았습니다.
'이렇게 귀여운 내 딸을 슬프게 해서는 안 돼.'
'그런데 나에게 이렇게 큰 딸아이가 있었던 걸까...?'
네넴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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