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R2 3394년 [사주]
정신을 차려보니 사지가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머리만 간신히 움직이는 상태였기 때문에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과 벽으로 둘러싸인 감방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작은 창문에 설치된 쇠창살 사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눈에 힘을 주고 뚫어지게 쳐다봤지만, 전등이 부족한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대적인 규모로 재생을 하게 되면 며칠 동안은 꼼짝 못 하고 잠만 자곤 했다. 잠을 자는 동안에는 무슨 짓을 당한다 해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신체의 절반 이상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재생을 했기 때문에 도대체 얼마나 잔 건지 가늠할 수조차 없을 만큼 오랫동안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정신이 드셨습니까?"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램프 불빛 아래에 모습을 드러낸 여자가 빌헬름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왜? 어째서?'
빌헬름의 머릿속은 온통 의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자의 생김새가 어쩐지 낯익게 느껴졌다. 오래된 기억들을 더듬다가 이 여자를 유레카라고 불렀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매우 위험한 조직의 구성원이라는 사실 또한 기억해냈다.
빌헬름은 유레카가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위대한 수령을 부활시키기 위한 열쇠」라고 일컬어지며, 연구원들에게 온갖 인체 실험을 당했던 과거가 있었다.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치명상을 입히진 않았지만,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밤낮없이 괴롭히고 온갖 실험을 해댔었다. 이미 십 년 남짓한 세월이 흘렀지만, 예전의 악몽 같던 기억이 빌헬름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이럴 수가…"
"살아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살아있다는 보고를 듣고 너무나도 뜻밖의 소식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나는 이제 쓸모없어진 거 아니었나? 왜 이런 짓을…"
"네. 그 당시에는 쓸모없었던 게 맞습니다. 하지만 살아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눈웃음을 짓고는 있지만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유레카의 눈을 본 순간, 과거에 이 조직의 연구원들에게 모진 일들을 당했던 날들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날 어떻게 할 작정이지?"
"괴물에게는 알려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레카는 그 말만을 남긴 후,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갔다.
유레카가 사라지자, 곧바로 조직의 연구원들이 들이닥쳐서 빌헬름을 구속장치로 묶어서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방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합성수지 같은 물질을 이용해서 손발을 수술대에 고정해 놓았다. 눈앞에 서 있는 연구원들은 모두 기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빌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녀석들의 수령은 이미 되살아났잖아. 나는 이제 필요 없을 텐데…"
"모처럼 만에 재미있는 실험 재료가 되돌아왔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이게 다 대선 세계를 위한 일이다."
"괴물 따위가 세계의 초석이 될 기회를 얻는다는 말이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도 모자랄 판에 증오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다니."
연구원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저마다 떠들어댔다 연구원들은 피부를 가르고, 뼈를 으스러트리고, 심장까지 뽑아내도 재생하는 빌헬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최상의 연구 재료로 취급했다. 연구원들은 아무리 가혹한 실험을 반복해도 끊임없이 재생하는 빌헬름을 「살아있는 장난감」으로 여기고 있었다.
"으…으윽…"
빌헬름이 낮게 신음했다. 복부와 머리 부분에 이식된 정체를 알 수 없는 식물이 빌헬름의 신체를 자양분으로 삼아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고통을 억제하는 약물을 투여받았지만,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빨리 약효가 떨어지는 빌헬름에게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빌헬름은 그저 하염없이 고통을 견디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재생능력에 변화는 없는 것으로 보이는군. 식물의 유전자 구조도 검사해봤지만, 그쪽에서도 변이된 부분은 발견하지 못했네."
"자양분을 제공해주고는 있지만, 영향은 미치지 못한다는 뜻인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식물을 절단해서 제거하고 다른 실험으로 전환하세. 식물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으니 다음에는 곤충을 실험해봐야겠군."
"그러세. 이 실험체가 재생할 때까지 기다린 후에 다름 실험에 착수하도록 하세."
기절조차 할 수 없는 빌헬름은 공허한 표정으로 연구원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끝없는 실험, 끝없는 고통, 끝없는 괴로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젠 지긋지긋해…"
'이대로 정신이 무너져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서 연구원들의 손에 온몸을 맡긴 채로 갖은 실험을 당하고 있었다.
"호오, 말을 할 여유도 있나 보군. 이봐, 그 물건을 사용하자."
"그 물건 말인가? 그건 아직 임상 실험을 할 단계가 아닐 텐데. 뇌에 강한 부작용을 남길 거야."
"그러니까 사용해보자는 말이야. 어차피 약물의 부작용 때문에 발광한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원래대로 회복되잖아. 이미 예전에 실험을 통해서 증명된 사실이라고."
연구원들의 말을 듣고 자신이 이미 여러 번이나 정신 이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미쳤었다는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몸의 이상이 마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정신이 멀쩡했던 것이 아니라 몸과 마찬가지로 정신도 무너졌다가 재생된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문제없겠군. 지금 바로 시작하지."
아직도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도 제정신임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여길 만큼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빌헬름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뇌에 강한 부작용을 미친다고 하는 약물이 투여되었다. 잠시 후, 마치 만취한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손과 목이 쇠사슬로 묶인 상태로 처음 갇혔던 감방 안에 방치되어 있었다.
"크… 크윽…"
복부에서 고통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고 살펴보았다. 세균이 들어가지 않도록 최소한의 처치만 해놓은 복부의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붕대에 스며든 선명한 핏자국이 아직 재생이 끝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빌헬름은 감방 안에 갇힌 채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이라도 재생 속도가 더디게 변한다면 쓸모없다며 내팽개치는 것은 아닐까?'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문득, 죽은 자의 군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목숨을 건질 당시에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 당시에는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다는 마음에서 우러난 강한 의지를 품었었다.
의지가 상처의 재생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빌헬름은 자신의 팔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대로 물어뜯으며 살같에 상처를 남겼다. 피 맛이 입안 가득 퍼진 후에야 비로소 팔에서 입을 뗐다.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팔에 의식을 집중한 상태로 상처가 치료되는 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팔에 있던 상처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낫는 모습을 확인했다. 복부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풀고 상처를 살펴보았지만, 복부 쪽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재생되는 속도가 상당히 느려진 것 같았다. 역시 빌헬름이 예상한 대로 신체가 재생되는 특이한 능력이 자신의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도록 변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빌헬름은 조직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예전처럼 상처의 재생이 더뎌진다고는 해도 버려질 가능성은 희박했다.
지금처럼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상태로 갖은 실험을 견디며 살 수는 없었다. 결심을 굳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탈출의 기회가 찾아왔다.
"오늘은 꽤 잘 견디는군."
"좋아, 조금 더 깊게 도려내자. 전에 심어 놓았던 곤충의 알을 찾아보자고."
연구원들은 고통을 참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며 탈출의 기회를 엿보는 빌헬름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복부를 메스로 찢어발기고 있었다. 빌헬름은 실험이 끝나고 구속장치가 풀릴 때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버텨야만 한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기절하지 않도록 애를 썼다.
"못 찾겠는데."
"유충의 흔적도 찾지 못하겠군. 몸 밖으로 배출된 건가? 만약에 배출된 거라면 관찰이 필요하겠어."
연구원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빌헬름의 구멍이 뚫린 복부에 붕대만 대강 감아놓았다.
"다시 한 번 곤충의 알을 심어 놓고 피부가 재생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해야 할 필요가 있겠군."
"재생을 저지할 수 있는 약을 개발해야겠네."
다음 실험에 대한 호기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대화를 나누던 연구원이 빌헬름의 구속장치를 풀었다. 구속장치에서 빌헬름이 연구원에게 매달리는 듯한 자세로 쓰러졌다.
"이봐, 왜 그러나?"
"나도 몰라. 갑자기 내 쪽으로 쓰러졌다고."
"조심 좀 하게."
상태를 살펴보던 연구원이 시선을 돌린 순간, 빌헬름은 붙잡고 있던 연구원의 생명력을 빨아들인다는 상상을 하고 머릿속으로 그 과정을 그려보았다.
"아, 아악… 배, 배가… 배가 아파, 아프다고, 아프단 말이다!!"
배에서 피가 솟구치는 모습을 본 연구원이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빌헬름은 복부의 고통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연구원이 느닷없이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몸부림치다가 실험대에 부딪히는 바람에 연구원과 빌헬름이 뒤엉킨 상태로 바닥에 쓰러졌다.
"괴, 괴물 같은 녀석.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다른 연구원은 손에 잡히는 메스나 실험 도구들을 빌헬름을 향해 닥치는 대로 마구 집어 던졌다. 비명을 지르던 연구원은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기절했는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빌헬름은 날아오는 실험 도구들을 맞으면서도 연구원에게 다가가 얼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생명력을 빨아들였다.
"히, 히익… 그… 그만…!"
"죽이진 않겠다… 나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필요할 뿐이다."
연구원들의 움직임이 멎은 것을 확인한 후, 연구원의 의복을 빼앗아 입고 실험실에서 휴게실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휴게실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고, 누군가가 들어올 것 같은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시야에 들어온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건물 바로 곁에 강이 흐르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강의 깊이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도주로는 이곳밖에 없는 것 같았다. 강에 뛰어들었다가 수심이 얕은 탓에 골절상을 입는다 하더라도 어차피 금방 나을 게 뻔했다.
'잠깐의 고통과 탈출에 실패한 후에 이어질 고문이나 다름없는 고통 중에 어느 쪽이 나을 것인가?'
망설일 필요조차 없는 문제였다. 빌헬름은 주저하지 않고 강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후, 창문을 열었다. 그 순간, 갑자기 실험실 쪽이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다른 연구원들이 빌헬름이 사라진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다행히 창문은 사람 한 명 정도는 빠져나갈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빌헬름은 서둘러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그대로 강으로 뛰어들었다.
운 좋게도 수심은 깊은 편이었고, 물살도 상당히 빠른 강이었다. 빌헬름이 수면에서 얼굴을 내밀고 헤엄치기 시작했다. 연구원들의 생명력을 빨아들인 덕분에 놀랄 만큼 몸이 가볍게 느껴져서 움직이기도 수월했다. 일단 실험시설에서 멀리 벗어나야만 했다. 빌헬름은 강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하류를 향해 정신없이 헤엄쳤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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