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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41~50/빌헬름

빌헬름 R1 3394년 [잔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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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R1 3394년 [잔광]


 날이 밝았다.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지고 햇빛이 트레이드 영구요새를 비추기 시작했다. 요새에 진을 치고 있는 루비오나 왕국 및 산하 연합군 병사들의 모습에서는 긴장감이 엿보였지만 약간의 여유도 느껴졌다. 빌헬름은 그런 분위기가 감도는 트레이드 영구요새 내부에 자리한 론즈브라우군 진지에서 이번 작전 내용을 재차 확인하고 있었다.

 

 "저게 뭐야…"

 

 누가 중얼거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늘에 거대한 기계처럼 보이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림자의 정체가 제국군이 보유한 거대전함 갈레온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요새 내부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갈레온에서 쏟아진 포격으로 인해 루비오나 왕국군이 머물던 진지 일부가 무너져서 잔해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병사들은 폭발에 휩쓸려 산산조각이 났고, 화약 연기와 피비린내가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공포에 빠져 경황이 없던 지휘부 때문에 더욱 큰 피해가 발생했다. 지휘체계가 무너진 왕국군은 제국병사들의 돌격에 대응하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했다.

 

 "전하, 이 상황이 이어지면 우리 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빌헬름은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룬왈드에게 지시를 내려달라고 간청했다. 론즈브라우군은 포격에 집적적으로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통제가 유지되고는 있었지만, 병사들 사이에는 공포와 혼란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모든 군사들에게 후퇴하라는 지시를 내려라. 괴물에게서 벗어나 기회를 노린다."
 "알겠습니다!"

 

 빌헬름이 집결해 있던 병사들에게 그룬왈드의 지시를 전했다. 빌헬름보다도 나이가 어린 병사들의 표정은 숨길 수 없는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트레이드 영구요새로 파병할 부대를 통솔하라는 명령이 빌헬름에게 전해진 것은 불과 몇 개월 전의 일이었다. 총대장인 그룬왈드를 필두로 요새로 떠나는 모든 부대원 중에서 빌헬름이 가장 연장자였다. 론즈브라우 왕국 내부에서는 「왕국군, 아직까지 기세등등!」이라는 기사가 보도되고 있었지만, 몇 번이나 거듭된 파병으로 인해 병사들은 피폐해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트레이드 영구요새로 파병되는 병력은 나이가 젊고 체력이 왕성한 어린 병사들이 징집되었다고 했다. 상층부와 그다지 연관이 없는 빌헬름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만 알려져 있었다.

 "자네가 소속된 부대는 가혹한 전장에서도 반드시 살아 돌아온다는 소문을 들었네."
 "저 혼자만의 힘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대장님과 부대원들의 연계가 원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겸손한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네. 다음변에도 변함없는 활약을 기대하겠네. 그룬왈드 왕자전하께 결례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게나."
 "네."

 

 다양한 요건을 고려한 끝에 빌헬름의 승진이 결정되었고, 그에 따라 [트레이드 영구요새 파견부대 대대장]이라는 주위 사람은 물론이고 본인도 당황할 만큼 어마어마한 직함이 부여되었다.

 거대전함에서 불기둥이 치솟아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루비오나 왕국군이 보유한 장갑병이 나서서 대규모 화력공세를 퍼부었다.

 

 "지금이다! 돌격하라!"

 

 그룬왈드의 명령이 떨어졌다. 총대장이 몸소 나서서 갈레온의 추락 예상지점을 향해 가장 먼저 돌격하고 있었다.
그룬왈드가 지나간 자리에는 일격에 심장이 꿰뚫린 제국군의 시체와 목에서 피를 뿜어내며 경련하고 있는 제국군들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빌헬름은 제국군의 피로 새빨갛게 물들어버린 그룬왈드의 망토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면서 부지런히 그룬왈드의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

 

 "서둘러라, 전하를 지켜라!"

 

 마치 귀신 같은 모습으로 전장을 누비는 그룬왈드를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시무시한 왕자, 섬뜩한 흑태자. 사람들이 그룬왈드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 숨어서 그렇게 수군대고 있다는 사실은 빌헬름도 알고 있었다. 바람처럼 싸우는 그룬왈드의 모습은 확실히 두렵게 느껴지긴 했지만, 동시에 넋을 잃고 바라보게 만드는 기묘하고도 통쾌한 느낌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빌헬름은 그렇게 느꼈다.

 왕국군과 제국군이 갈레온의 갑판에서 서로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천장의 한복판에 이상한 모습의 여성이 서 있었다. 하얀 군복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지휘봉을 들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긴 했지만, 왠지 섬뜩하게 느껴지는 여장군이었다. 그룬왈드가 그 여장군을 향해 뛰어들었다. 빌헬름은 그룬왈드를 막기 위해 달려드는 제국병사들을 베어 쓰러트리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제국 병사들을 베어버린 것인지 파악할 수조차 없었다. 빌헬름도 적군의 피와 자신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 때문에 피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그룬왈드가 여장군에게 칼을 찔러 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승부의 결과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살아남은 왕국군과 론즈브라우군의 병사들이 환희의 함성인지 아니면 절규인지 알 수 없는 고함을 질러댔다.

 …뚝. 뚝. 뚝. 주르륵. 갑자기 들려온 불쾌한 소리 때문에 고함 소리가 끊기고 말았다.

 

 "자, 죽은 자들이여. 여러분의 손으로 새로운 죽음을 창조하세요!"

 

 여장군이 녹색의 체액을 흘리며 기쁨의 함성 같기도 하고 절규 같기도 한 고함을 지르는 모습이 빌헬름의 눈에 들어왔다. 목과 몸통이 갈기갈기 찢어진 시체가 일어서서 빌헬름의 시야를 가로막았기 때문에 여장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시체는 왕국군의 제복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콰직, 우드득, 주르륵… 축축하고 음산하게 느껴지는 소리가 전장의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괴물이다!"
 "으, 으아아아악!!"

 

 환희가 넘쳐흐르던 장소가 한 순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전장은 혼란의 소용돌이로 변했다. 죽은 자가 되어 다시 일어선 병사는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산 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통솔 따위가 통할 리가 없었다. 공황 상태에 빠진 병사들은 죽은 자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퇴각했다. 하지만 도망간 곳도 이미 부활한 죽은 자들로 가득해서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잡아먹히고 말았다. 빌헬름도 도망가는 병사들의 파도에 휩쓸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갈레온의 갑판 위를 달려야만 했다.

 그때, 느닷없이 뒤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의 주인공이 그룬왈드라는 것을 알아채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빌헬름은 그룬왈드가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던 기묘하고도 통쾌한 기분의 정체가 그룬왈드의 쾌락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죽은 자들이여, 평범한 고깃덩어리로 돌아가라!"

 

 그룬왈드는 엄청난 검술을 선보이며 죽은 자들을 날려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직후의 어마어마한 폭음이 울려 퍼지고 폭발에 휩쓸려버린 그룬왈드가 갑판 밖으로 튕겨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빌헬름의 신체는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두려운 상황과 마주치게 되었지만, 론즈브라우의 왕자를 그 자리에 버려두고 도망갈 수는 없었다. 지금도 그룬왈드의 말과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빌헬름은 환청을 떨쳐 버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죽은 자를 닥치는 대로 베러버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파도를 헤쳐나가며 천신만고 끝에 지면에 내려설 수가 있었다. 새롭게 생겨난 죽은 자들은 쥐떼가 불어나는 것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트레이드 영구요새가 죽은 자들로 뒤덮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지면에 내팽겨쳐진 그룬왈드의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비참하게 변해 있었다. 그룬왈드가 주로 쓰던 오른팔은 팔꿈치 아랫부분이 떨어져 나갔고, 죽은 자가 물어뜯은 곳에서는 내장이 흘러나와 있었으며, 그 내장 또한 죽은 자들이 물어뜯어 갈래갈래 찢겨 있었다. 단정한 외모였던 얼굴도 턱 부근이 심하게 뜯겨나간 채로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상태였다.

 빌헬름은 자신보다 체격이 큰 그룬왈드를 안아 올린 후, 등 뒤까지 쫓아온 죽은 자들의 군대를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론즈브라우군의 진지 바로 근처까지 다다랐을 무렵에서야 후방을 지원하기 위해 남아있던 소대와 합류할 수가 있었다.

 

 "대대장님! 전하는…"

 

 죽은 자들에게 물린 그룬왈드의 처참한 모습을 힐끔 본 병사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빌헬름을 바라보았다.

 

 "아직 살아계신다. 위생병이 있는 곳으로 모셔다 드리거라. 나는 이곳에 남아서 죽은 자들을 가로막겠다."
 "대대장님, 하지만 이 상태로는…"
 "우리는 왕자 전하를 모시는 부하이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하를 론즈브라우 왕국으로 호송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알아들었으면 가거라!"
 "알, 알겠습니다!"

 

 빌헬름은 그룬왈드를 병사에게 맡기고 그 자리를 지키며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죽은 자들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굼떴다.

 그러나 죽은 자들은 마치 새로운 희생자를 갈구하는 듯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제국의 병사도, 왕국의 병사도, 론즈브라우 왕국의 병사들마저도 죽은 자로 변해 있었다.

 죽은 자 하나가 빌헬름을 물어뜯었다. 빌헬름의 움직임이 둔해진 틈을 타 이빨을 드러낸 죽은 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빌헬름은 산처럼 불어난 죽은 자들에게 파묻히고 말았다. 죽은 자들에게 둘러싸여 빛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소리와 감각만으로도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충분히 파악할 수가 있었다.

 온몸의 살점이 뜯겨 나가고 있었다. 죽은 자들이 게걸스러운 소리를 내며 갈비뼈와 정강이뼈를 갉아 먹는 느낌이 전해졌다. 죽은 자들의 뼈와 이빨이 온몸을 덮쳤고 구멍이 뚫린 곳을 통해 내장이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피도 빨려 나가고 있었다. 두개골이 죽은 자들의 이빨에 의해 부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가 대뇌를 자극한 탓에 반사적으로 구토를 했으나, 토해낸 것은 핏덩어리밖에 없었다.

 빌헬름은 그런 상황에서도 안간힘을 쓰며 저항하고 있었다. 감각이 남아있는 오른팔을 휘두르자 죽은 자의 일부가 잘려나가며 생긴 틈으로 빛이 스며들었다. 그 틈을 통해 그룬왈드를 업고 산길을 내려가는 론즈브라우 병사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포기할 수 없었다. 만약에 지금 이곳에서 자신이 죽는다면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병사와 그룬왈드도 죽은 자들의 먹이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아직까지 몸 안에 남아있던 심장이 힘차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심장이 뛰기 시작하자 죽은 자들이 남김없이 빨아들여서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던 피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남아있던 오른팔을 뻗어 죽은 자의 살점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빌헬름이 움켜쥔 죽은 자의 살점이 뭉개지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빌헬름의 살점을 삼켰던 죽은 자들에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죽은 자들이 차례차례 무너져 내리는 것과 동시에 빌헬름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피가 멈췄다. 죽은 자들이 살아 움직이던 인간일 때에 지니고 있던 생명력의 잔재를 자신이 남김없이 빨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빌헬름 본인도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꿈틀대던 죽은 자들로 만들어진 산이 산사태라도 일어난 것처럼 무너져 내렸다. 혼자 남은 빌헬름은 자신의 근육, 장기, 피로 이루어진 웅덩이 속에서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크…으윽…"

 

 빌헬름은 모든 것이 흐릿하게만 느껴지는 와중에도 흘러내리는 피와 떨어져 나가는 살점들을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며 가파르게 경사진 산길을 굴러 떨어지듯이 내려왔다. 이 부근의 지형지물에 대한 지식이 없던 빌헬름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신체의 대부분이 사라졌고 내장과 뼈는 고사하고 뇌수마저도 드러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는 것만은 피해야 했다. 대부분의 감각이 마비되어 있었다. 신경도 끊어진 상태일지도 모른다. 빌헬름에게 더 이상 움직일 만한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던 순간, 불현듯 날카로운 칼로 후벼 파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마비되어 있던 감각이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상처 언저리에서 뛰고 있는 맥박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남아있던 근율과 살점들이 조금씩 재생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뼈도 작은 소리와 함께 원래의 형태대로 복원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애써 초점을 맞춘 흐릿한 눈으로 내장이 사라진 복부를 바라보니 남아있던 내장의 조각들이 꿈틀대며 새로운 내장을 만들어 내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 이런 상태라도 나는…"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모든 생각이 날아가버릴 정도의 엄청난 고통과 피로가 빌헬름을 덮쳤다. 괴로워하는 빌헬름의 의식을 어둠이 집어삼켰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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