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R3 [변이]
석조로 이루어진 거리가 참혹하게 무너져 있었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갑자기 광장에 나타난 검고 어두운 「무언가」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 「무언가」는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마을을 파괴하고, 침식 범위를 점점 넓혀가고 있었다.
빌헬름과 그의 가족은 마을 주민들이 그 「무언가」를 피해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왔다. 빌헬름의 집안은 마을의 수호자 가문이었으므로 그 지역에 재앙이 일어나면 앞장서서 사람들을 구조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무언가」의 침식은 거침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의 구조를 끝낸 후에 빌헬름의 가족들도 탈출하려고 했지만, 때를 놓쳐버린 탓에 탈출할 수가 없었다. 빌헬름의 가족을 향해 검고 어두운 「무언가」가 달려들었다. 이미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죽음을 각오했다.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던 빌헬름은 다가오는 죽음의 냄새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아버지가 빌헬름의 손을 잡았다.
"너에게 희망을…"
"아버지?"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버지가 소중한 무언가를 자신에게 맡겼다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전해졌다. 돌 같은 물체를 움켜쥔 듯한 느낌이 들자마자 빌헬름의 몸이 작렬하는 열기에 휩싸였다. 피와 살을 송두리째 태워버릴 듯한 열기를 감당할 수 없었던 빌헬름은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빌헬름은 혼자서 황야를 걷고 있었다. 지금이 언제인지,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건지, 어떻게 이런 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의식이 또렷해지기 전까지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자신만 살아남은 것인지, 무엇 하나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만이 빌헬름의 가슴 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재앙이 잇따라 들이닥쳤다. 어떤 때는 산불에 휩싸인 적도 있었다. 마수가 산에 불을 질렀다고 했다. 야생 동물과 함께 도망칠 길을 찾아 헤매다가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살이 타들어 가는 감촉이 적나라하게 느껴졌고 열기가 온몸을 집어삼키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려보니 사냥꾼의 움막에 누워 있었다. 물가에 쓰러져 있던 빌헬름을 근처에 살고 있던 사냥꾼이 발견해서 움막으로 옮겼다고 했다. 또 어떤 때는 마수에게 쫓기던 운송 업자가 마수를 따돌리기 위해 빌헬름을 미끼로 사용한 적도 있었다.
"미안하다, 꼬마야.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료들이 있어서 어쩔 수가 없구나."
빌헬름은 마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저항해봤지만, 덧없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마수에게 철저히 유린당했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상처 하나 없는 모습으로 황야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어째서 나는…"
그렇게 심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끝에 어떤 나라의 빈민가에 다다르게 되었다. 자신의 몸이 심상치 않다고 자각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지나가다가 어깨가 살짝 부딪혔을 뿐이었는데 상대방이 시비를 걸었다. 얼이 빠진 듯한 빌헬름의 표정이 시비를 걸 만한 빌미를 제공한 것일지도 몰랐다.
"아? 뭐야, 이 자식아."
"죄송합니…다…"
빌헬름이 사과했지만, 그들은 사과를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평소에 쌓여있던 짜증을 해소하려는 심산인지 빌헬름을 쉴 새 없이 때리고 걷어찼다. 빌헬름에게는 저항할 힘도 없었다. 그저 그들의 기분이 풀리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드려 맞던 와중에 강렬한 일격이 뒤통수를 강타하는 것을 느꼈다. 빌헬름은 짤막한 신음을 흘린 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질 않았다.
"형님, 이 녀석이 꼼짝도 하지 않는데요."
"그냥 내버려 둬. 시체가 하나 늘어나 봤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그런 대화가 저 멀리서 들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의식은 점점 더 흐려지기만 할 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을 떠보니 이미 아침이 밝아 있었다. 골목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빌헬름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멍한 시선으로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빌헬름을 두들겨 팼던 남자들이 골목으로 들어왔다.
"뭐야, 너… 어제 그렇게 심하게 두드려 맞고도…"
"… 형님, 이 녀석 뭔가 이상해요!"
남자들은 빌헬름이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들이 두들겨 팰 때 생겼던 상처들이 깨끗이 나아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어, 어이, 모두 도망쳐. 이 녀석은 괴물이다!"
빌헬름은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나 보니 상처가 아물어 있었다는 사실밖에 아는 것이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다친 건지 알려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상처가 아무는 속도가 평범한 사람과 다르고, 어떤 상처를 입어도 죽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않는다. 그 사실을 자각한 빌헬름은 빈민가를 뒤로하고 또다시 황야로 뛰쳐나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장소가 두려웠다. 괴물이라고 불리는 것이 두려웠다. 빌헬름은 그렇게 황야에서 방황하다가 마수에게 습격을 당했다. 내장도, 뇌도, 살점도 모두 마수에게 내어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정신을 차리면 또다시 멀쩡한 상태로 회복되어 있을 거라는 절망감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이내 찾아든 극심한 고통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어이, 여기 누가 쓰러져 있어!"
"상처가 너무 심하다! 일단 성당으로 옮겨!"
사람들의 목소리에 희미하게나마 의식을 되찾았다.
'역시 또 살아남고 말았구나.'
그런 절망감만 곱씹다가 정신을 잃었다.
빌헬름이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움직일 수 없도록 온몸을 구속하는 옷이 입혀진 상태로 어두컴컴한 방에 누워 있었다.
"정신이 드셨습니까?"
무표정한 여자가 눈앞에 서서 차가운 시선으로 빌헬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는…"
"여기가 어딘지 알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부터 우리 수령님을 살리기 위한 초석이 될 테니까요."
"무슨…"
"영광으로 생각하세요. 신을 되살리기 위한 제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빌헬름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금까지 겪었던 재앙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느껴질 만큼 끔찍한 고통이었다. 백의를 입은 남자들은 빌헬름을 철저하게 괴롭혔다. 근육과 내장, 뇌세포에 이르기까지 온갖 신체 부위를 몇 번이나 잘라내고 그걸로도 모자라 갈아서 으깨버리기도 했다. 모든 물체를 녹여버리는 액체 속에 목과 머리를 제외한 모든 부분을 담그기도 했다. 모든 것이 얼어붙을 듯한 장소에 방치한 적도 있었다. 마수와 함께 우리에 가둬놓은 후, 아무 저항도 못 하고 잡혀 먹히는 모습을 관찰하기도 했다. 그래도 재생되고 목숨이 붙어있는 빌헬름을 본 백의를 입은 남자들은 혈안이 되어 빌헬름의 신체를 연구했다. 백의를 입은 남자들은 빌헬름을 죽지 않는 세포, 죽지 않는 괴물이라고 부르면서 빌헬름의 신체에 담겨있는 신비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연구에 몰두했다.
빌헬름은 고통 때문에 기절하고 고통 때문에 눈을 뜨는 일상을 반복하게 되었다. 심할 때는 내장을 적출하거나 두개골이 깎이고 있는 도중에 의식을 되찾는 경우도 있었다. 정신도 무너져 내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나중에야 비로소 이때 겪었던 일들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의 빌헬름에게는 그런 사실을 파악할 만한 여유도 없었고, 파악했다 하더라도 알릴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 사이에 몸 상태가 한계로 치닫고 있었다. 상처의 재생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상처 입은 몸은 며칠이 지나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재생 능력이 떨어지고 있군."
"죽지 않는 괴물이라도 한계가 존재하긴 하나 보네. 어떻게 할까?"
"구스타브님의 재생은 이미 시작되었으니까 이 녀석을 어떻게 처리할 지 유레카님께 여쭤보자."
몽롱한 의식 속에서 백의의 남자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었다.
그 후로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 빌헬름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장소에 폐기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쓰레기 집하장 같은 곳에 버려져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았다. 빌헬름은 흘러나오는 피와 내장 조각들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백의를 입은 남자들에게 난도질당한 몸은 재생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감각은 완전히 마비되어 통증도 느껴지질 않았고, 난도질당한 부위조차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왜 정신을 차린 걸까?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로 죽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동틀 무렵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꼴을 당하면서까지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
빌헬름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었다. 검고 어두운 「무언가」가 마을을 습격했을 때, 혼자 살아남은 것에 대한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호자 가문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무엇 하나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런 자책도 이제 끝이다. 재생되지 않는 몸을 바라보면서 막연하게나마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야 겨우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제야 겨우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감았다.
"… 빠!"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겁게 짓누르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려 보니 한 소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빌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시야를 가득 채우던 밝은 하늘은 온데간데없었고 눈앞에는 푸른 초목이 펼쳐져 있었다. 잠기운이 가시지 않아서 멍한 상태였지만, 아무래도 과거에 겪었던 일에 대한 꿈을 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빠, 괜찮아?"
"너, 너…는…"
"기다려, 당장 사람을 불러올게!"
소녀의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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