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시아 R2 2790년 [의지]
보이드에 도달한 후로 120억년이 지났다. 처음에 떠나온 항성계는 이미 완전하게 열역학적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그곳에 존재하던 모든 생명은 멸종했을 것이다.
스테이시아는 그토록 긴 시간이 경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실험을 반복하고 있었다. 스테이시아의 인공두뇌는 실험을 개시하고 나서 32억년째가 되던 해에 자기 확장성을 획득한 후로 점차 규모를 확대하더니 이제는 혹성이라 할만한 크기에 이르렀다. 인공두뇌의 중심에는 순수한 케이오시움으로 만들어진 코어 시스템이 탄탄히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다원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나 다름없는 코어를 조작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관측하는 작업이 1초 동안에 수천만 번이나 이루어지고 있었다.
실험을 거듭하는 동안 조금씩이긴 해도 착실하게 완전한 자유가능세계로 접근하고 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증거를 찾아낸 스테이시아의 가상 인격에 기쁨의 감정이 흘러 넘쳤다. 계산에 의하면 앞으로 108억년 후에 자유가능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메르키오르의 계획대로 올바르게 진행되었던 것이었다.
"마스터, 드디어 특이점을 발견했습니다! 이젠 시간이 흘러서 그 시점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면 돼요. 고작 100억년 남짓 남았을 뿐이에요."
스테이시아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창조주의 이름을 불렀다. 스테이시아의 가상 인격은 중요한 부분을 극히 느린 클록으로 구동하고 있었다. 현재의 스테이시아에게 1억년은 불과 며칠처럼 짧게 느껴졌다. 스테이시아가 발광을 일으키게 되는 인격붕괴 현상을 피하기 위한 방책이었지만, 그에 따른 부산물로 스테이시아의 인격은 영원히 성장을 억제 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후로 또다시 20억년이 지났을 무렵, 스테이시아는 혹성과 비견될 만한 크기라는 공간적인 속박에서도 해방되어 다원세계적으로 확장하는 일에도 성공했다. 코어를 통한 다원세계의 관측에 만족하지 않고 다원세계를 향한 간섭, 침식을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나를 만들고, 내가 나를 만든다."
가상 인격의 혼잣말과 함께 자기 자신의 복제품을 다원세계로 방출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스테이시아는 새로운 스테이시아를 만들고, 다원세계는 스테이시아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다. 마주보는 거울 속에 비치는 세계처럼 모든 세계에 스테이시아가 존재했다. 그리고 모든 스테이시아는 합일된 존재였다. 그녀는 하나의 의식을 공유하며 시공을 초월하는 거대한 사고기계가 되기 위한 성장을 계속했다.
10 e + 31회의 관측 끝에 마침내 목적을 달성했다. 스테이시아가 만들어진 지도 230억년이 흘렀다. 스테이시아는 우주 전체가 열역학적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특이점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 완전한 자유가능세계에는 스테이시아 자기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기보다 그곳은 오직 그녀만이 존재하는 세계였다.
"마침내 도달했어."
스테이시아는 이전에 설정되었던 테스트를 개시했다.
"신체를 갖고 싶어."
시커먼 허공에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의 눈 앞에는 혹성 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린 연산기계인 스테이시아가 있었다. 전자두뇌 속에서 의지가 발생하는 것과 동시에 전자두뇌가 원하는 사실이 발현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원하는 사실이 발현되는 세계를 선택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다음은 사과."
눈깜짝할 사이에 스테이시아의 손 안에 사과가 나타났다.
"해냈어. 이제 돌아갈 수 있어. 마스터가 계신 곳으로 돌아갈 수 있어!"
스테이시아는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기뻐했다. 신과 다름없는 힘을 손에 넣은 스테이시아였지만, 그녀의 인격은 메르키오르가 설정한 상태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스테이시아의 의지의 원천이기도 한 기억은 복종회로에 의해 엄밀히 제한되어 있었다.
"자, 저의 의지에 따라 세계를 다시 써 나가도록 하죠."
스테이시아라는 [존재]의 출현은 거대한 폭발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과를 초월한 충격파처럼 스테이시아라는 존재가 모든 다원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충격파가 그녀를 최초로 만들어낸 세계의 축에 도달했다.
그라이바흐는 메르키오르의 방에서 연구 데이터가 표시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메르키오르, 내게서 훔쳐 간 기술로 뭘 만든 거지?"
"훔쳤다고? 너의 기술을 잠시 동안 빌렸을 뿐이야."
메르키오르는 그라이바흐의 추궁에도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무단으로 나의 기술을 사용한 것은 용서하도록 하지. 사전에 양해를 구했다면 빌려줬을 테니까."
"고맙기 그지없는 우정이군."
메르키오르는 평소와 다르게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라이바흐는 이렇게나 밝은 모습의 메르키오르를 보는 것이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어른이 되고 난 후에는 처음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이군."
"위대한 실험, 아니, 실험이 아니지. 진정한 위업이 달성되려 하고 있으니까 기분이 좋을 수밖에."
"로켓 실험에 대한 일 말인가?"
"뭐, 그렇지. 축배라도 들고 싶은 기분이야. 여기에 술이 없는 것이 아쉽군."
메르키오르는 어질러진 방의 중앙부분에 있는 소파에 앉아 쾌활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라이바흐도 모니터 앞에서 벗어나 메르키오르와 마주보고 앉았다.
"자세하게 들려주지 않겠나? 그 실험에 나의 인공지능을 사용한 거겠지?"
"뭐, 그렇다고 봐야지. 나의 아이디어를 구현화하는 도구로서 마지막 열쇠가 될 만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주었으니까 말이야."
절대적인 자신감이 메르키오르의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실험의 세부 사항에 대해서 전에도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요컨대 가능성의 확장에 대한 실험이야."
그라이바흐는 묵묵히 메르키오르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이 가능세계를 자유롭게 조작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어.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나도 알아. 하지만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아이디어를 마침내 실현시켰다고."
메르키오르는 흥분하면서 자신의 실험에 대한 세부사항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라이바흐는 들어주는 역할에 충실했다.
"확실히 일리가 있군. 인과를 조작할 수 있는 기계를 인과가 발생할 수조차 없는 허공으로 보내서 무한하다고 할만한 오랜 시간을 사용하여 성장시킨다는 이론이라니."
그라이바흐는 대략적인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듣고 나서 대답했다.
"그렇지. 인과에서 얼마만큼 독립할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어. 그걸 알아낸 후에 새로운 인과를 발생시키기 위해서 영원한 시간을 살아갈 수 있는 지능이 필요했지."
"단지 물질에 불과하다면 그곳에 존재하기만 할 테니까."
"그래. 의지라는 것은 지능이 있어야만 성립하지. 욕망이나 기억이없으면 인과를 발생시킬 수가 없어."
"욕망이라… 너는 그런 세속적인 개념에 대해서 흥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흥미라기보다 가설의 구축 단계에서 도출해낸 필연이라고 말하는 게 적당하겠지."
"하지만 나의 인공지능을 무한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계속해서 작동시킨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어. 애초에 그런 상황을 상정해서 만든 게 아니니까 말이지. 내가 만든 인공지능은 창발을 실행하고 인간과 아주 흡사하게 행동하지. 그렇기 때문에 우수한 거지만…"
그라이바흐는 눈살을 찌푸리며 메르키오르에게 말했다.
"그런 상황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려했어. 인공지능에는 복종회로를 심어두었다고. 지능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다가 어느 개념, 간단히 말하자면 나와 내가 속한 것에 대한 증오가 생기면 그것을 억제시키고, 전체적으로 안정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인격부분이 리셋되도록 설정해 두었어."
"흠."
그라이바흐는 숙고를 거듭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메르키오르의 실험이 성공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기괴한 착각에 사로잡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의료 관리마저 받지 않고 연구에 몰두한 끝에 도달한 단순한 망상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관심을 끄는 것은 무한한 시간을 부여한 자신의 인공지능이 대체 어떤 성장을 하게 될지 궁금했다. 무한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하나의 인공지능이 계속해서 살아간다면 어떤 사상과 어떤 감정을 생성해내게 될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실험 결과는 언제쯤 알 수 있는 거지?"
"내 계산대로라면 몇 주에서 몇 개월 안에 결과가 나올 게 분명해. 아니, 어쩌면 좀 더 빨라질지도… 인과를 초월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생긴다 한들 이상할 게 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
그라이바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결과가 나오면 제일 먼저 나에게 알려줘."
그라이바흐는 결과 따윈 나올 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다만 제정신이 아닌 친구 앞에서 모멸감에 찬 표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을 분이었다.
"그래, 물론이지. 너에게도 영광을 누릴 자격이 있어."
메르키오르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라이바흐가 현관을 향해가려던 순간, 감시용 모니터에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마스터, 임무 수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메르키오르와 그라이바흐는 동시에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아무 소리도 나지 않던 모니터가 깜빡이더니 음성에 맞춰 파장의 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니터에 연결된 음성출력장치에서 기계음도 아니고 그렇다고 육성도 아닌 높은 피치로 조정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순간, 기묘한 침묵이 방을 뒤덮었다. 로켓이 발사된 후로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설마, 아직 제3 우주속도에도 도달하지 못했을 텐데. 아니, 그게 아니지 내 계산이…"
메르키오르는 순간적으로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곧바로 진지한 얼굴을 되찾고 모니터를 향해 질문을 했다.
"정말 스테이시아가 맞는 거지?"
"실험은 성공입니다. 마스터."
메르키오르가 부르는 소리에 모니터가 대답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라이바흐는 짧게 중얼거렸다.
"스테이시아, 실험을 다음 단계로 진행시키도록!"
"네, 마스터.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스테이시아는 순순히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메르키오르는 그 모습을 보고 복종회로가 문제없이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메르키오르는 스테이시아와 대화를 나눈 순간부터 그라이바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급히 서두르는 모습으로 연구실에서 나갔다. 혼자 남은 그라이바흐는 스테이시아의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설마, 정말로 실험에 성공했다는 말인가? …아니, 이건 수작을 부리는 것이겠지?"
"아닙니다, 수작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다. 아마도 너는 이곳의 메인 프레임에 탑재된 인공지능이겠지."
"믿지 못하겠다면 나의 힘을 보여드리지요. 그라이바흐."
스테이시아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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