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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41~50/메리

메리 R2 3398년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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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R2 3398년 [현실]


 메리는 노트를 펼쳐놓고 글자를 써 내려가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방 안에는 사각사각 연필 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메리의 방은 평범한 어린아이의 방과 다를 바 없었다. 조그만 침대와 책상, 최소한의 생필품을 넣기 위한 장롱, 어린이용 소설책과 교재들이 꽂혀 있는 책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른 어린아이의 방과 다른 점은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노트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사용해서 너덜너덜해진 노트부터 손도 대지 않은 새 노트까지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로 쌓여 있었다.

 "메리, 이제 곧 예배드릴 시간이란다."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여수도승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수도승의 목소리를 들은 메리는 글자를 써 내려가던 손을 멈추고 펜을 내려놓은 후, 방문을 열었다.

 

 "모두 기다리고 있단다. 어서 예배당으로 가려무나."
 "네에."

 

 메리는 마무리 짓지 못한 글이 못내 신경 쓰였지만, 여수도승의 말에 따라 예배당으로 향했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 사제가 읊는 기도문을 듣고는 있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다음 내용을 빨리 노트에 적어두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메리는 예배가 끝나자마자 거의 뛰다시피 서두르며 자기 방으로 돌아온 후, 쓰다 만 노트에 다시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로 글을 쓰는 일에만 몰두했다. 해가 질 무렵,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그제야 노트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

 

 "메리, 방에 있니?"

 

 메리가 방문을 열어보니, 점심 예배 시간에 메리를 부르러 왔던 여수도승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자벨 선생님? 무슨 일이야?"
 "아, 다행이다. 도통 모습이 보이질 않아서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걱정하고 있었단다."
 "아니, 나는 계속 방에만 있었는데?"
 "그랬구나… 또 글을 쓰고 있는 거니?"

 

 이자벨이라는 이름의 여수도승은 메리의 등 뒤에 보이는 노트로 시선을 옮겼다.
 "응!"
 "지금은 어떤 이야기를 쓰고 있니? 읽어봐도 될까?"
 "응, 한 번 읽어 봐!"

 

 메리는 방긋 웃는 얼굴로 완성된 노트를 이자벨에게 내밀었다. 노트에는 소녀의 서투른 글씨체로 웅장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었다.

 

 "음… 그러니까, 그저께부터 시작된 꿈이야. 내가 공주님이고, 오빠가 왕자님이야."

 

 메리는 수줍은 말투로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기뻐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구나, 재미있을 것 같은 꿈이네."
 "그래서 말이지, 다양한 곳들을 돌아다니면서 모험을 했어. 오늘 아침에는 바다 밑에 있는 거대한 신전에 갔었다."

 

 오늘 아침에 꿈에서 본 광경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설명하는 메리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본 이자벨은 난처하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맞장구를 쳐줄 수밖에 없었다. 메리는 반년 전쯤에 일어난 참혹한 사건에 휘말린 후로 정신이 균형을 잃고 붕괴되었다. 메리는 꿈에서 본 내용을 노트에 옮겨 적는 일을 통해 간신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 메리는 성당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있는 한적한 식물원을 방문했다.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식물원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정적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몹시 스산하게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식물원의 소유주인 오하라라는 노인과 빌헬름이라는 젊은 남자가 식물원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방치된 탓에 잡초와 다를 바 없이 변해버린 나무와 화초들을 메리가 혼자 돌보고 있었다.

 

 "또 여기 와 있었구나. 사제님께서 여기 오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을텐데."

 

 식물원 구석에서 흙을 고르고 있던 메리를 발견한 이자벨이 메리에게 말을 건넸다.

 

 "미안해요… 그치만, 오빠에게 이곳을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이자벨은 메리의 말을 듣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메리가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오하라와 함께 식물원을 관리하던 빌헬름이었다. 몇 년 전, 큰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던 빌헬름을 메리가 발견해서 성당 사람들에게 알렸고, 그 후로 성당에서 빌헬름을 보살펴 주게 되었다. 빌헬름은 상처가 완치된 후에도 갈 곳이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식물원의 관리를 돕는 직원으로 고용해서 식물원에서 지내도록 배려해주었었다.

 빌헬름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지만, 심성이 착하고 자상했으며 일도 열심히 하는 성실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빌헬름은 메리가 정신병을 앓게 된 원인이었던 그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에 행발불명 되었다. 사건의 최초 목격자였던 오하라의 이야기에 따르면, 엄청난 양의 피로 인해 식물원의 관리실이 피바다로 변해 있었고, 그 피바다의 한복판에는 예리한 칼날 같은 물체에 관통되어 무수한 구멍이 뚫려 버린 의복이 남겨져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의복에 둘러싸인 채로 발견된 메리는 마치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지켜주기라도 한 것처럼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남겨진 의복은 사건이 일어났던 바로 그 날, 빌헬름이 입고 있었던 옷이 분명했지만 옷의 주인인 빌헬름은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빌헬름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생사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불가사의하고 참혹한 사건이었지만, 용의자는 사건 직후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용의자가 범행 사실을 한결같이 부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의 진상규명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식물원은 참혹한 사건이 일어났던 사건 현장이기도 했고, 오하라의 나이가 많아서 식물들을 돌볼 수 없다는 이유로 폐쇄되는 바람에 지금은 얼씬거리는 사람조차 없는 장소로 변해버렸다. 빌헬름과 함께 사건에 휘말렸던 메리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여파로 사건 전후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진 메리는 빌헬름이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으며, 자리를 비우는 동안에 식물원을 돌봐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망상을 만들어내고 그게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때때로 성당에서 빠져나와 이 쓸쓸하고 스산한 식물원에 숨어들곤 했다.

 "그래. 하지만 그만하기로 하자."
 "왜?"
 "사제님께서 당부하신 말씀을 어기면 안 되잖니?"
 "하지만 오빠가 이곳을 부탁한다고…"

 

 메리는 이자벨의 말에 수긍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고, 식물원을 보살피는 일을 그만두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이 식물원에 오고 싶다면 사제님께 정식으로 말씀드려보려무나."
 "사제님께서 허락을 해주시면 식물원에 와도 되는 거야?"
 "그럼, 물론이지. 그러니까 사제님께 꼭 말씀드려야 한다. 알겠지?"
 "응!"

 

 이자벨은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메리를 바라보면서 남몰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도 메리에게 현실에 대해 알려주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메리는 깊은 좌절에 빠졌고 결국 성당에서 뛰쳐나가 버렸다. 그때는 다행히도 성 다리우스 대성당 근처에서 발견되어 별일 없이 넘어갔지만, 다음에 같은 일이 생기게 되면 무사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자칫 잘못해서 빈민가로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메리의 현재 정신 상태로는 살아서 돌아올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현재, 메리는 빌헬름을 기다리면서 꿈의 내용을 노트에 옮겨 적는 일을 통해 간신히 정신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부분만 제외한다면 메리는 약간의 몽상가 기질을 지니고 있는 평범한 소녀였다. 사제와 이자벨을 비롯한 수도승들은 메리가 꿈에서 본 내용을 옮겨 적는 일을 몇 년 동안 지속하다 보면 빌헬름의 죽음을 포함한 현실들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메리에게 현실을 알려주지 않고 덮어두기로 했다.

 "오빠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성당으로 돌아오는 길에 메리가 아무런 의심도 없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메리는 빌헬름에 대한 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언제나 천진난만하게 행동했다.

 

 "… 그래, 그가 별 탈 없이 여행을 다닐 수 있도록 기도하자꾸나."
 "응. 기도할 거야!"

 

 이자벨의 말을 들은 메리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땅거미가 내릴 무렵, 수도 루베스에서는 꿈틀대는 죽은 자들의 무리와 이형 생물들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형 생물들은 압도적인 완력과 염력처럼 느껴지는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하여 죽은 자들의 무리를 휩쓸어버리고 있었다. 그런 이형 생물들과 맞서 싸우는 죽은 자들의 무리는 어마어마하게 튼튼한 내구성을 지닌 신체를 이용하여 이형 생물들의 엄청난 힘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메리는 대성당의 탑 꼭대기에서 죽은 자들과 이형 생물들이 싸우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허공에서 깃털 펜과 종이를 소환하더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전장의 관경을 종이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대략적인 전장의 광경을 옮겨 적는 일을 마치자, 깃털 펜과 종이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찾아야 해…"

 

 메리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후, 탑에서 뛰어내렸다. 중력을 무시한 움직임으로 공중에 떠다니다가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의 한복판에 내려섰다. 진흙과 흙먼지, 그리고 피로 얼룩진 전장의 한복판에서 예쁜 분홍색 옷을 입고 서 있는 메리의 모습은 무척이나 눈에 띄었으며 몹시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거리를 활보하는 죽은 자의 무리는 물론이고 이형 생물들도 메리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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