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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그레이브 R1 2814년 [자살]
의료용 침대에 누워 있는 인물은 마치 잠을 자는 듯 두 눈을 감고 있다.
“정말로 가시는 겁니까? 레드그레이브님!”
곁에는 흰 가운을 걸친 남자가 서 있다. 누워있는 여자는 그 말에 대답이 없다. 그녀의 균형 잡힌 아름다움은 결코 노령에 접어든 나이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작별하게 될 줄이야… 저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흰 가운을 걸친 남자는 침대에 누워있는 인물에게 호소하듯 말했다.
“감상에 사로잡히지 마라. 이는 미래를 구하기 위함이다. 누군가는 가야만 하는 길이다.”
“알겠습니다… 부디 무사하시기를…”
수술을 집도할 의사단이 들어 오자 흰 가운을 두른 남자는 아쉬움을 남긴 채 침대에서 물러난다. 침대에 누워있는 인물은 레드그레이브. 세계의 ‘통치자’이며 ‘감시자’로 불린 여자. 그녀는 약 70년에 걸쳐 인간 세계를 통치한 후, 마지막 여정을 떠났다.
황혼의 시대, 자동 기계의 발달로 인류는 굶주림과 노동에서 해방되어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지혜의 발전을 쇠퇴시켰고, 마음을 황폐하게 하였다.
세계를 통치하는 엔지니어들은 자신이 만들어 낸 이 번영에 만족하지 않았다. 세계를 개선하고 유지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엔지니어들은 하나의 실험을 시작했다. 유전자가 조작된 수백 명의 인간을 만들어, 그중에서 특출난 세 사람을 고르는 연구를 진행한 것이다. 이 연구로 탄생 된 세 사람은 그라이바흐, 메르키오르, 레드그레이브라는 이름으로 각 분야에서 활약을 펼쳤다. 그라이바흐는 가치를 창출해내는 더욱 정교한 오토마타의 개발에, 메르키오르는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주목받고 있는 케이오시움의 연구에, 그리고 마지막 한 명, 레드그레이브는 사회 기구를 개량하는 사업을 담당했다.
그라이바흐는 뛰어난 지성과 함께 오토마타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세계는 오토마타가 만들어 낸 열매를 인간이 단지 수확하기만 하는 것이 아닌, 인간과 오토마타가 공존하는 세계였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이 정체된 세계는 새로운 진화를 보일 것이다. 그것이 그라이바흐의 생각이었다.
메르키오르는 그야말로 연구를 위해 만들어진, 케이오시움을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라 불리는 존재였다. 에너지원으로서 사회의 근간을 지탱해주고 있는 케이오시움을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공급하는 것만을 목표로 연구를 계속했다.
메르키오르에게 있어 케이오시움이란 인간보다 존중해야 할 존재이며, 그의 전부였다.
레드그레이브는 다른 두 사람과는 다른 관점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레드그레이브는 세상의 모든 일을 항상 높은 곳에서 감시한다. 그리고 문제점을 찾아 수정하고 재발하지 않기 위한 조처를 한다. 그것은 마치 사람을 치유하는 의사와 같았고, 기계를 치유하는 엔지니어와도 같았다. 인간은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이며, 암세포가 있으면 그것을 제거한다. 그 일에 인간의 정이라는 불필요한 것이 들어갈 여지란 없다. 그것이 레드그레이브의 생각이다.
세 사람이 세상에 나온 뒤로 그라이바흐와 메르키오르는 이내 눈부신 성과를 이뤄냈다. 특히 그라이바흐가 만들어 낸 ‘지성을 가진 오토마타’는 오토마타와 인류의 관계에 대한 역사를 새로 썼다고 할 정도였다. 메르키오르도 케이오시움의 재활용 방법에 관한 획기적인 연구 성과를 올려, 두 사람의 명망은 날로 높아지고 있었다. 반면 레드그레이브가 실시한 정책의 효과는 미미했고, 평가받기에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사회 통치는 발명이나 연구 등에 비해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얻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세 사람은 자주 모여 서로의 연구와 일에 관해서 의견을 나눴다. 선택된 사람으로서의 연대감과 세 사람 만이 세계를 개척할 수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메르키오르, 그 연구는 어떻게 되었어? 전에 얘기한 다중 세계의 관측에 케이오시움을 이용하는 것 말이야.”
그라이바흐가 홍차를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한다. 세 사람은 그라이바흐의 정원에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원은 그의 정교한 오토마타에 의해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그라이바흐의 심미안은 다른 두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는 일종의 창조주이자 완전한 아름다움에 이바지하는 예술가적인 측면도 있었다.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어. 그리고 더는 관측이라는 개념은 사용하지 않아. 더 새로운 연구 결과가 있거든.”
메르키오르는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혼잣말을 하듯 대답했다. 두 사람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메르키오르는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에 익숙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남매와도 같은 두 사람에게조차 이럴 정도였다. 세 명 모두 서른에 가까워진 나이였지만, 육체적인 변화는 거의 없었고, 마치 사춘기 소년 소녀로 보였다.
“새로운 결과?”
레드그레이브가 관심을 보이며 질문한다. 레드그레이브의 얼굴은 포근하게 미소 짓고 있다. 그녀의 외모는 뛰어날 정도로 아름다웠고, 표정도 완성되어 있었다. 인민의 중심에서 통치하기 위해 태어난 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케이오시움은 가능성의 덩어리야. 가능성을 에너지로 가둔 상태의 입자이지. 지금은 편리하고 해로움이 없는 궁극의 효율을 가진 축전지 정도로만 사용되고 있지만 말이야.”
“거기까지는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이야. 여기 있는 모든 오토마타도 케이오시움으로 움직이고 있고.”
그라이바흐가 조금은 타이르듯이 말한다.
“그 가능성의 덩어리라는 관점에서 아직 선택되지 않은 상태, 즉 무와 유의 사이에 있는 것들을 모아 어떠한 성질을 갖게 하면, 이 세계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게 돼.”
메르키오르는 그라이바흐의 빈정거리는 듯한 행동을 눈치채지 못한 듯 혼잣말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얘기한다.
“의미를 모르겠어요. 구체적으로는?”
레드그레이브는 솔직하게 말했다.
“너도 이 세계가 많은 가능성으로 가득 차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
“물론.”
엉뚱한 질문에 레드그레이브가 웃으며 대답하자, 메르키오르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힌다. 그리고는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말을 이어나간다.
“예를 들자면, 이 차. 이대로 놔두면 자연스럽게 식어 가지. 조금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엔트로피는 반드시 증가 된다고 할 수 있어. 하지만 이 엔트로피가 증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은, ‘천문학적인 가능성이 쌓여 증가 된 후에 보이는 것’일 뿐에 불과해. 당연해 보이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무한의 가능성에는 예외가 있을 수 있어. 즉, 지금 이 80도의 홍차가 10분 후에 70도가 되어있는 세계가 당연하다고 하더라도, 제한이 없는 다중 세계가 있다고 한다면, 어딘가에는 다시 100도로 끓고 있는 세계가 있다는 거야.”
레드그레이브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말하는 메르키오르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주사위를 만 번 던졌을 때 어딘가에는 모두 6이 나오는 세계가 있다는 말이지.”
그라이바흐가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한다.
“그래, 맞아. 그 세계는 반드시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어. 그리고 그 세계를 케이오시움의 힘을 빌려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거야.”
“확실히 대단하군. 불가능이 없는 세계라는 것은 말이야.”
그라이바흐는 웃으며 일부러 놀라는 척한다.
“다른 세계에 무가치한 가능성을 강요함으로써 원하는 세계를 선택할 수 있어.”
“그렇지만 무한에서 무언가 하나를 골라낸다는 건, 그 자체에 에너지가 있다는 거 아니야?”
레드그레이브가 질문한다.
“응, 정보는 그 자체가 에너지야. 무언가를 관찰하고 그것을 골라내는 일에도 에너지가 필요하지. 그래서 다른 아이디어가 있기는 하지만 더 이상은 아직 말해줄 수 없어.”
메르키오르는 갑자기 침울해하며 입을 다물었다.
“과연, 메르키오르다운 좋은 관점이네. 재미있는 이야기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 달라고.”
그라이바흐는 갑자기 침울해진 메르키오르의 어깨를 잡으며 의젓한 태도로 말했다.
“응.”
메르키오르는 짧게 대답한 뒤 “또다시 하자.”라고 말하며 허둥지둥 자리를 뜬다.
“또 만나자, 메르키오르.”
“아, 응.”
메르키오르는 레드그레이브의 작별 인사에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났다.
단둘만 남게 된 테이블에서 그라이바흐가 레드그레이브의 손을 잡고 말했다.
“최근에 힘이 없어 보이네.”
“그래? 평소랑 다를 바 없는데. 오히려 당신이야말로 최근 신작 발표 때문에 지친 거 같은데?”
“응, 좀 힘드네. 지금은 분명 정체되어 있거든. 매년 성과를 바라지만 항상 완벽한 건 아니라서.”
“메르키오르도 고민하고 있는 것 같고, 당신들 재능도 이제 한계에 다다른걸까?”
레드그레이브가 장난스럽게 웃는다.
“무슨 소리, 아직 멀었어. 메르키오르의 다음 연구는 분명 엄청난 것이지만, 내 목표도 그에 못지않다구.”
“다음 목표? 그건 뭐야? 얘기해 줄 수 있어?”
“독창성을 가진 오토마타야. 단순한 지성이 아닌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오토마타지.”
“꽤 수준이 높아지네... 그런데 그런 오토마타를 갖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건 너를 위해서이기도 해. 결점이 없는 판단력과 새로운 발견을 목표로 하는 오토마타가 천한 인민을 지도하게 된다면 세계는 금방 안정될 거야. 네가 하고 있는 인민을 보살피는 일은 더는 하지 않아도 되는 거지.”
“나를 실업자로 만들려구? 당신은 항상 인간을 싫어하는 듯한 말투로구나. 우리도 인간이야.”
레드그레이브는 농담으로 넘기려 하지만, 그라이바흐의 눈은 진지했다.
“너는 인민을 사랑하도록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야.”
“당신도 그렇지 않아?”
“결국, 우리는 ‘만들어진 것’에 불과해. 나는 네가 인민에 애착을 느끼는 것처럼, 오토마타에 애정을 갖고 있는 거야.”
“기계에도 그런 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지능형 시스템은 충분히 유용한 가치가 있어.”
“그럼 다행이네.”
레드그레이브는 그라이바흐에게 키스했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레드그레이브의 통치능력은 좋은 평가를 얻게 되었다. 미모의 지도자는 세계에 활력을 가져왔다. 레드그레이브가 가져온 평화로운 날들은 영원히 계속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평화에 처음으로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레드그레이브 앞으로 전달된 하나의 소식이었다.
'천재 엔지니어 그라이바흐 자살'
그 문서에는 그라이바흐의 소식이 쓰여 있었다. 이제 젊은 시절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끈끈한 유대로 연결된 남매라고 생각해온 남자의 죽음에 레드그레이브는 큰 충격을 받았다.
“메르키오르도 이 소식을 알고 있는가?”
레드그레이브는 비서에게 물었다.
“아직 연구소에 계실 겁니다, 바로 확인해보겠습니다. 모든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기 때문에, 메르키오르님도 아마 보셨을 거라 생각됩니다만…”
메르키오르의 활동도 예전만큼 활발하지는 못했다. 변명 정도에 불과한 논문을 발표하고는 자신의 연구소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런가, 알았다.”
두 사람과 소원해진 것도 그들이 목표로 하는 발명이나 연구가 막다른 곳에 와있던 것이 원인이었다. 또한, 레드그레이브 자신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정신을 포함한 건강에 대해 의문을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말 자신이 알고 있던 그라이바흐가 자살을 선택한 것일까? 이 의문이 레드그레이브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치안 관리국의 책임자와 할 얘기가 있다. 지금 바로 연락해두게.”
레드그레이브는 비서에게 그렇게 말한 뒤 자리를 나섰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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