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살해, 암매장 장면이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루드 R3 2835년 [흙]
한 남자가 숲 속을 걷고 있었다. 최근에 되는 일이 없어서 짜증을 부리던 그 남자는 조금 전까지 동료와 함께 밤새도록 술을 마셨기 때문에 취기를 가라앉히려고 밤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산책을 하던 와중에 숲으로 들어가는 수상한 그림자를 목격했다. 수상한 그림자는 사람처럼 보였으며 두 명인 것 같았다.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모르지만, 부피가 큰 자루를 짊어지고 걷는 수상한 그림자의 모습이 몹시 섬뜩하게 느껴졌다. 남자는 술기운 때문에 용기가 생겼는지, 수상한 그림자들의 뒤를 따라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깊은 밤, 정적이 감돌던 숲 속에 땅을 파는 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등이 굽은 남자와 또 한 명의 남자가 구덩이를 깊게 파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이 보였고, 구덩이 근처에 무언가로 가득 찬 마대 자루가 놓여 있었다. 잠시 후, 남자는 「무언가」가 들어있는 마대 자루를 구덩이 속으로 거칠게 던져 넣고 땅을 파헤칠 때 나온 흙으로 구덩이를 다시 메우기 시작했다. 흙을 덮고 발로 밟아 다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구덩이를 다시 파헤치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뭐야? 저게 무슨 짓이지..."
깊은 숲 속에 내려앉은 밤공기가 유난히 더 차갑게 느껴지고 있었다.
메렌의 마술쇼를 시작으로 서커스의 막이 올랐다. 여느 때와 다른 점은 무대 구석에 서 있어야 할 단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단장님은?"
"아직도 몸 상태가 안 좋다고 하던데.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보거나 왕진을 부탁해보라고 했지만, 돈이 든다는 핑계로 한사코 거절하더라고."
다음 쇼를 위해 대기하던 루드의 주변에 모여든 마크와 단원들이 단장의 건강을 걱정하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단장은 하루의 대부분을 자신의 텐트 안에서만 보내고 있었다. 예전에는 항상 무대 구석에서 대기하며 쇼가 진행되는 상황을 감독하고 있었지만, 요즘엔 그런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단장은 노움과 브라우만 자신의 텐트에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아무도 접근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단장의 몸 상태를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단장의 텐트에 드나드는 노움과 브라우밖에 없었다.
단장의 몸 상태에 대해 노움에게 물어봤지만, 노움은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단장님이 아무도 접근하지 않게 해달라고 하셨어요."라는 대답만 했다. 그렇다고 브라우에게 물어보려고 해도 브라우는 그저 시종 역할을 하는 오토마타에 불과했기 때문에 노움보다도 단장의 명령에 더 충실하게 따르며 단장이 시킨 말만 되풀이했다. 마크는 여러 번에 걸쳐서 단장을 직접 만나려고 시도해봤지만, 단장은 그때마다 몸 상태가 안 좋다는 핑계를 대며 마크를 쫓아내기 일쑤였다.
"걸리적거리지 말고 저리 비켜!"
서커스의 회계 담당자가 쇼를 마치고 내려온 메렌을 발로 차며 투덜댔다. 메렌은 단지 루드와 교대하기 위해 통로 구석에 서 있었을 뿐이지 길을 가로막은 게 아니었지만, 저항이나 변명도 하지 않고 회계 담당자의 발에 채여 그 자리에 쓰러졌다. 루드는 메렌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손을 내밀려다가 인간이 지켜보고 있어서 그만두었다. 인간이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오토마타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모습을 들키면 곤란하다고 전자두뇌가 경고했다.
"제기랄."
회계 담당자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루드는 회계 담당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줄곧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내용의 쇼를 하면 그 지역의 주민들은 당연히 싫증을 내기 마련이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수입은 이미 감소 추세에 접어들었고 슬슬 다른 곳으로 이동을 고려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그런 상황인데도 단장은 쇼를 지속하라는 지시만 내릴 뿐, 텐트에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확연히 줄어든 수입 때문에 빈곤한 생활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인 단원들은 오토마타들에게 화풀이를 해대고 있었다. 루드가 쇼를 끝마치고 무대 구석으로 돌아와 보니 마크가 수리를 빙자하여 오우란을 전기 충격봉으로 때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루드는 자신의 파트너나 다름없는 존재인 오우란을 구해주고 싶다는 감정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구해주고 싶다는 감정과 전자두뇌의 경고를 거역할 수 없다는 생각이 충돌하는 바람에 직접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결국, 오우란은 마크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계속 두드려 맞았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던 루드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날 밤, 루드가 비레아와 함께 노움에게 점검을 받고 있을 때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어이, 애송이. 우리 모르게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냐!"
느닷없이 수리 텐트에 들이닥친 회계 담당자가 노움을 보자마자 호통을 쳤다. 얼굴이 시뻘겋고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니 술을 잔뜩 마시고 거나하게 취한 것 같았다. 회계 담당자는 단장이 텐트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게 된 무렵에 단장이 노움만 텐트로 불렀던 일을 알고 있었다.
"단장님이 우리를 내팽개치고 너 같은 녀석을 곁에 둘 리가 없어. 단장님께 무슨 짓을 한 거냐! 말하란 말이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단장님의 지시에 따른 것뿐이에요!"
"거짓말하지 마라!"
회계 담당자는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대답을 하는 노움을 가차 없이 후려갈겼고, 노움은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노움!"
점검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비레아가 비명을 질렀고, 실프는 회계 담당자를 위협하기 위해 으르렁거렸다. 루드도 점검을 받던 중이라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신체를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시끄러워!"
격분한 회계 담당자가 실프를 집어 들어 비레아에게 던졌다. 내동댕이쳐진 실프는 작은 소리로 애처롭게 끙끙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비레아도 실프와 부딪힌 충격으로 회로에 이상이 생겼는지 덜덜 떨기 시작했다.
"실프와 비레아는 아무 죄도 없잖아요! 그만두세요!"
쓰러졌다가 일어난 노움이 실프와 비레아를 감싸며 회계 담당자를 말렸다. 그 모습이 회계 담당자의 신경을 더욱 거슬리게 만든 모양이었다.
"애송이 주제에!"
회계 담당자는 충혈된 눈으로 노움을 노려보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전기 충격봉을 꺼내서 노움을 때리려고 하였다.
"그... 그만두세요...!"
참다못한 루드가 전자두뇌의 경고를 무시하고 회계 담당자를 들이받았다.
"네 녀석도 나를 거역할 셈이냐!"
회계 담당자가 고함을 지르며 루드에게 달려들었다. 루드는 점검을 받던 중이었기 때문에 온몸 곳곳에 전선들이 드러나 있는 상태였고, 회계 담당자는 그 전선들을 잡아 뽑으려고 했다.
"안, 됩...니다."
"젠장, 이거 놔라!"
루드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회계 담당자를 제압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지금 이 상태에서 회계 담당자를 놓친다면 또다시 노움에게 달려들 게 뻔했다. 하지만 점검이 끝나지 않은 탓에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아서 오히려 회계 담당자에게 짓눌리고 말았다.
"이 자식! 몸이 조금 움직인다고 나를 이길 줄 알았더냐!!"
회계 담당자가 전기 충격봉을 치켜들었다.
‘나는 여기서 끝을 맞이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루드는 회계 담당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기 충격봉은 루드의 머리를 향해 내리꽂히지 않았고, 무언가 무거운 물건으로 후려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순간, 회계 담당자가 외마디 신음을 흘리며 루드 쪽으로 쓰러졌고 루드와 회계 담당자를 내려다보며 서 있는 비레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비레아의 손에는 대형 오토마타를 들어 올릴 때 사용하는 무거운 소형 기중기가 들려있었다.
"모두를 괴롭히다니... 용서... 못 해!!"
회계 담당자의 몸에 짓눌려 있던 루드가 빠져나왔다. 회계 담당자는 아무리 건드려봐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기는커녕 붉은 액체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레아... 미안해... 미안해..."
기중기를 내려놓은 비레아를 끌어안고 있는 노움은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회계 담당자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챈 사람은 노움밖에 없는 것 같았다.
"노움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하지만 이제는 단장님과 같은 방법으로 처리할 수는 없어. 회계 담당자까지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다면 마크와 단원들이 이번에야말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지만, 노움은 몹시 동요하고 있는 것 같았다. 루드는 이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한 좋은 방법이 없을지 힌트가 될 만한 단서를 찾아 기억회로를 더듬어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서커스단에서 예전에 공연했던 미스터리 연극의 한 장면을 오래된 기억 속에서 찾아냈다.
"그의 몸을 숲 속 깊은 곳에 파묻기로 하죠."
"루드...?"
"그가 이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우리뿐입니다. 저와 비레아, 그리고 노움만 입을 다문다면 분명히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루드는 자신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제안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그 무시무시한 제안은 노움을 지키기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해야만 한다는 간절한 마음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루드는 노움에게 간단히 수리를 받은 후, 회계 담당자를 집어넣은 마대 자루를 짊어지고 비레아와 함께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지금이라도 그만두자. 마크와 단원들에게는 회계 담당자가 사고를 당했다고 설명하자."
노움은 루드와 비레아를 설득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비레아가 노움의 의견을 반대했다.
"인간은 노움을 괴롭혀, 우리들을 괴롭혀. 모두 나쁜 녀석들이야. 나쁜 녀석들은 없어진다고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비레아는 노움에게 인간은 모두 나쁘다는 말을 하며 억지로 루드의 뜻에 따르도록 만들었다.
"자, 시작할까?"
"알았어."
루드와 비레아는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흙을 파헤치는 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졌다. 마대 자루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자루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루드와 비레아는 구덩이를 깊게 파는 일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뭐야? 저게 무슨 짓이지..."
취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숲 속을 산책하던 마크가 그 광경을 전부 다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로 구덩이만 파고 있었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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