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드 R2 2835년 [가치]
루드는 쇼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서커스 천막 안에서 쇼에서 쓰였던 도구들을 지정된 장소로 옮기고 있었다. 도구를 높은 선반 위에 올려두기 위해서 팔과 다리를 힘껏 뻗은 순간, 루드의 오른쪽 다리 관절부분에서 기계가 뒤틀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루드, 뭘 하고 있는 거야? 빨리빨리 정리해 아직도 옮겨야 할 물건이 남아있단 말이야.”
돈을 금고에 넣어두기 위해 들어온 회계 담당자가 도구를 들고 서 있는 루드에게 빨리 정리하라고 재촉했다.
“죄송합니다. 오른쪽 다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습니다.”
“뭐야, 너도 상태가 안 좋은 거야? 도구는 거기에 놔두고 단장님께 보고하고 와.”
“알겠습니다.”
회계 담당자의 명령을 받은 루드는 단장실로 향했다. 단장실에 도착해보니 단장은 방에 없었고, 방을 청소하고 있는 브라우의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루드는 단장이 돌아올 때까지 방 앞에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무슨 일이니?”
단장의 방 앞에 선 채로 한참을 기다리고 있던 루드를 본 노움이 말을 건넸다. 노움은 작은 자동인형이 붙어있는 단장의 시계를 손에 들고 있었다.
“오른쪽 다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단장님에게 보고하고 명령을 받기 위해 왔습니다.”
“단장님은 마을로 놀러 나갔어. 오늘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하던데. 수리를 받기 위해 단장님의 허가가 필요한 거라면 오늘은 일단 네 담당구역으로 돌아가서 대기하는 게 나을 거야.”
“알겠습니다.”
노움은 그런 말을 남기고 시계를 가져다 두기 위해 단장의 방을 들어갔다. 루드는 노움의 뒷모습을 지켜본 후, 창고로 돌아가 휴식기능을 활성화시켰다.
루드의 상태는 다음 날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른쪽 다리의 움직임은 더욱더 둔해졌고, 그런 다리의 움직임을 보완하기 위해서 온몸의 움직임마저 어색하게 변하고 말았다. 쇼가 시작되기 직전이 되어서야 돌아온 단장은 오늘 공연이 끝나면 수리를 해주겠다고 말했다. 쇼가 진행되는 도중에도 위태로운 상황이 있었지만 간신히 모면하고 무사히 쇼를 끝마칠 수가 있었다.
“루드, 수리를 받으러 가기 전에 이것 좀 옮겨놔라.”
“알겠습니다.”
마크가 노움의 거처로 가려고 하는 루드를 불러 세웠다. 마크가 서 있는 곳에는 인간이 옮길 수 없을 만큼 무거워 보이는 도구가 놓여 있었다. 루드는 마크의 지시에 따라 무거운 도구를 창고로 옮기고 있었다. 그 때, 인간으로 말하자면 고관절에 해당하는 부품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위험해!”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루드는 그 목소리를 듣긴 했지만 곧바로 반응할 수가 없었다. 오른쪽 다리가 망가지면서 순식간에 밸런스가 무너진 루드는 정리 중이던 도구가 놓여있는 장소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창고 주위에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루드가 고꾸라진 충격으로 인해 창고에 쌓여있던 많은 도구들의 쓰러지면서 루드를 덮쳤다.
“무슨 일이야?”
단장과 마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루드 녀석이 도구 밑에 깔려있어.”
“뭐라고? 나 원 참. 어쩔 수 없군. 어이, 너희들. 여기 좀 정리해놔.”
단자의 명령을 받은 자동인형들이 쓰러진 도구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도구에 깔려있던 루드의 형체가 드러났다. 다리가 부자연스러운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고 왼팔부터 가슴까지 심하게 짓눌려 찌그러져 있었다.
“단장, 어떻게 하지? 이 상태라면 다음 쇼는…”
마크와 단장의 목소리가 루드의 귀에는 굉장히 멀게만 느껴졌다.
“이렇게 심하게 부서졌으니 버릴 수밖에 없잖아. 애송이가 살펴본다고 해도 소용없을 것 같은데.”
“알았어.”
루드는 사고가 일어난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서커스단의 쓰레기장에 버려졌다. 루드를 쓰레기장으로 옮긴 난쟁이 자동인형들이 쓰레기장 근처에서 요란하게 웃어대며 놀고 있었다. 루드는 아직 전원이 꺼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인식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동인형은 고도의 인공지능 덕분에 인간과 비슷하게 행동하긴 했지만, 어차피 기계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인형은 부여된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일밖에 할 수 없던 것이었다.
“비레아, 여기니?”
“그렇습니다. 여기에 루드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쟁이들의 웃음소리가 그치더니 노움과 비레아가 나타났다.
“아아, 이건…”
“고칠 수 있겠습니까?”
“응, 상태가 조금 안 좋아 보이지만 고칠 수 있어. 난쟁이들아, 비레아와 함께 루드를 내 천막으로 옮겨줘.”
루드는 비레아와 난쟁이들의 손에 들려 노움의 천막을 옮겨졌다.
“어이, 애송이. 그 녀석을 거기 내버려둬. 마음대로 가져가지마.”
“루드는 수리가 가능한 상태예요. 모레까지 수리를 완료해서 다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드리죠.”
천막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만난 회계 담당자가 노움과 비레아를 꾸짖었다.
“왜 그래?”
노움과 회계 담당자가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단장이 방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단장님, 애송이가 루드를 고칠 수 있다며 우기고 있습니다.”
“호오. 애송아, 정말이냐?”
“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고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상태로는…”
“애송이가 고칠 수 있다고 하는 걸 보니 아직 수리가 가능한 모양이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둬.”
“그건 그렇지만…”
“애송아, 거기 있으면 걸리적거리니까 그 녀석을 빨리 옮기거라.”
단장은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회계 담당자를 무시하고 노움을 향해 얼른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노움의 천막 안을 어슬렁거리던 실프라는 이름의 강아지가 루드의 상태를 힐끗 쳐다보더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천막 한 켠으로 이동해서 몸을 웅크리고는 잠이 들어버렸다. 노움은 루드를 작업대에 눕힌 후, 온몸을 샅샅이 검사하고 분석하면서 몇 가지 메모를 작성하더니 비레아에게 메모를 건네주었다.
“이 메모에 적혀있는 물건을 가져와. 여기 없는 물건은 쓰레기장에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비레아는 메모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품을 찾기 위해 천막 안을 뒤지고 다녔다.
“그럼, 우선 전원을 한 번 차단하게. 그 전에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니?”
“아닙니다. 없습니다.”
“알았어. 그럼 잘 자, 루드.”
노움이라는 소년은 자동인형을 사람처럼 대할 때가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루드는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목을 움직여보니 고관절 부분의 수리를 막 끝낸 노움의 모습이 보였다.
“좋은 아침이야, 루드. 기분은 좀 어때?”
“네, 매우 좋습니다.”
“학습과잉 상태였던 연산 프로그램도 약간 조정해뒀거든.”
“감사합니다. 매우 상쾌한 기분입니다.”
“그래? 그거 잘 됐네.”
노움이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얼굴이 후드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밸런스 조정이 잘 되었는지 보고 싶으니까 일어나봐.”
루드는 노움이 시키는 대로 일어나서 지면에 발을 디뎠다. 기분 탓인지 예전보다도 거동이 부드러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이네.”
한동안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상태를 확인하고 있을 때, 비레아가 천막으로 들어왔다. 비레아의 손에는 수선을 마친 루드의 옷이 들려 있었다. 루드는 자기 옷을 본 순간, 불현듯 부끄럽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지금 자신의 상태는 인공피부가 벗겨져서 내부가 드러난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설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가져왔습니다.”
“고마워, 비레아. 루드에게 건네줘.”
“네.”
“고, 고맙다…”
루드는 서둘러 옷을 입었다. 늘 입고 있던 무대 의상을 입으니 부끄러운 감정도 사라지고 마음이 놓였다. 그와 동시에 다시 작동하기 전까지는 느껴본 적이 없었던 뜻밖의 감정이 생겨났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아하하, 놀라지 않아도 돼. 지금은 이 상태가 정상이니까.”
루드의 상태를 눈치챈 노움이 웃었다.
‘단장과 단원들에게 신뢰를 받는 노움이 하는 말이니까 믿어도 되겠지.’
루드는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루드는 수리를 받은 부분의 상태를 살펴볼 겸, 작업대를 정리하는 일을 돕고 있었다. 정리를 하던 와중에 비레아가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비레아는 작업대에 놓여있던 부품을 발견하고는 노움에게 보고를 한 후, 그 부품을 폐기할 부품들이 들어있는 상자에 집어넣었다. 고철 덩어리라고 멸시당하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만 같았던 비레아가 군더더기 하나 없이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루드는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왜 그러니?”
넋을 잃고 비레아를 바라보고 있는 루드의 모습을 의아하게 여긴 노움이 말을 걸었다.
“아, 아닙니다, 비레아가…”
“아아, 비레아는 좋은 오토마타야. 오래되긴 했지만 그만큼 학습도 해왔으니까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러운 일이 닥쳐도 제 몫을 해내거든.”
“그랬군요.”
“너와 메렌을 포함해서 여기에 있는 오토마타들은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엄청난 가치가 있어. 언젠가 너도 알게 되는 날이 올 거야.”
노움은 무언가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한 말을 하며 웃었다. 루드는 노움의 말을 듣고 왠지 믿음직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 THE END -
'No.31~40 > 루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드 R4 2835년 [서커스] (0) | 2017.07.03 |
---|---|
루드 R3 2835년 [흙] (0) | 2016.07.23 |
루드 R1 2835년 [동물조련사] (0) | 2016.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