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렐 R2 3392년 [부유전함]
타이렐은 예전에 몸담았었던 디라톤 연구소에 연락을 했다. 디라톤 연구소는 병장국의 관리를 받고 있는 연구소였으며, 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는 헤이젤도 로휀의 부하 직원으로 근무했던 과거가 있었다. 그런 상황들을 고려한 결과, 헤이젤이 로휀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을 내렸다.
“오랜만이네요, 타이렐. 당신이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헤이젤은 연구소를 옮기기 전과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타이렐의 통신에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용건이라는 게 뭐죠?”
“네, 사정이 있어서 로휀 스승님과 연락을 취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예전에 병장국에서 로휀 스승님의 부하 직원으로 근무하셨던 헤이젤 소장님이라면 혹시 뭔가 알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렇게 여쭤보기 위해서 연락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로휀의 이름을 언급한 순간, 헤이젤이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이 보였다. 타이렐은 침묵에 잠긴 헤이젤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제가 맡고 있는 업무에 로휀 스승님께서 이륙하신 연구 성과가 필요하거든요.”
“로휀 스승님의 행방에 관한 소식은 나도 듣지 못했습니다. 스승님은 모든 책임을 내팽개치고 자취를 감춰버리셨으니까요.”
헤이젤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애를 쓰고 있었지만, 헤이젤의 말투에서 몹시 불쾌한 기색이 느껴졌다.
한때, 로휀이 우수한 병장기 연구자인 동시에 병장국의 국장도 겸임하던 시절이 있었다. 평상 시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연구자였지만, 레드브레이브가 [소용돌이]를 소멸시키기 위해 연대를 설립함에 따라 병장기에 대한 연구 성과를 인정받은 로휀이 연대 전담 엔지니어인 기술관장에 임명되어 지상으로 내려갔다. 연대에서 기술관장의 임기를 마치고 판데모니움으로 돌아온 후에는 교육자가 되어 자신의 지식을 아낌없이 베풀며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 타이렐은 로휀이 교육자였던 시절의 모습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로휀이 갑자기 판데모니움에서 자취를 감췄다. 단지 지상으로 내려갔다는 사실만 밝혀졌다. 로휀을 스승으로 섬기며 따르던 제자들은 로휀이 지상으로 내려갔다는 사실을 파악하자마자, 주도적으로 나서서 로휀을 찾아달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통제국에 제출했다. 하지만 통제국은 제자들의 수색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소동이 있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현재는 로휀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는 자가 없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혹시 로휀 스승님께서 남기신 연구 자료가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타이렐은 숨돌릴 틈도 없이 질문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일개 엔지니어에 불과한 자신의 신분만으로는 로휀의 정보를 추적하기가 무척 곤란했다. 타이렐은 「사자소생」에 대한 문제점을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는 조바심 때문인지, 로휀의 거처를 파악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로휀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나 연구 자료를 통해 어떻게든 단서를 끌어 모아야만 했다.
“로휀 스승님의 연구 성과는 모두 액시노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열람 제한 사항에 관한 일은 당신이 알아서 대처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헤이젤 소장님.”
“별말씀을. 하지만 로휀 스승님에 대한 소식을 나에게 묻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합니다.”
헤이젤이 아무 변화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설령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라고 해도 판데모니움에 사는 사람이 지상으로 내려간 사람과 적극적으로 연락을 취하려고 한다는 것은 적절치 못한 행동이었다. 특히 헤이젤처럼 사람들을 통솔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 신중하게 행동해야만 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타이렐은 벨린다를 테스트하는 와중에 잠시 짬을 내서 액시노 도서관을 찾아갔다. 그다지 이용자가 많지 않은 액시노 도서관은 병장기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나 황혼의 시대에 발명된 병기에 대한 연구 서적을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도서관이었다. 판데모니움에 있는 도서관들은 몇몇 도서관을 제외하면 소속된 연구소, 또는 소속 부서와 계급에 따라 열람할 수 있는 서적의 등급이 엄밀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망막 인증을 통해 계급과 소속의 확인을 마친 후, 서고의 안내 지도와 문을 열기위한 카드 키를 지급받았다. 로휀이 남긴 연구 성과나 서적은 타이렐의 계급으로도 아무 문제없이 열람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서고의 관리와 감시를 담당하는 드론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장소는 도서관 내부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드론의 정보에 따르면 이 부근에 보관되어 있는 문서들은 로휀이 참여했던 공동 연구를 포함한 모든 연구와 발명에 관련된 문서들이라고 했다. 로휀이 남긴 연구 성과에는 병장기 분야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에 걸친 연구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C.C.와 C.C.의 아버지인 세인츠는 로휀을 어떤 대상이든 가리지 않고 수용하고 연구를 거듭하는 기이하고 괴짜 같은 사람이라고 평가했었다. 타이렐은 눈 앞에 펼쳐진 다양한 연구 성과들이 로휀에 대한 평가를 증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몇 권의 서적을 집어 들었다. 로휀은 자신의 문하에 입문하여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떤 계급의 인물이든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였다. 그런 제자들 중에서도 세인츠와 특히 더 친밀하게 지냈으며, C.C.를 포함한 세인츠의 모든 가족들과도 교류를 나눌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세인츠도 레지멘트의 가혹한 업무로 인한 과로 때문에 쓰러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세인츠의 딸인 C.C.도…
세인츠와 C.C.가 살아있었다면 로휀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수월하게 찾아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타이렐의 뇌리를 스쳤지만, 금세 미련을 떨쳐버렸다. 세상을 떠난 고인들에게서 단서를 찾으려고 하는 자신의 꼴사나운 모습이 우습고도 염치없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에 몰린 나머지 두뇌 회전이 느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타이렐은 한 번쯤 어딘가로 훌쩍 떠나서 기분 전환을 하고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로휀이 발표했던 논문과 서적들을 차근차근 읽고 있었다. 그러나 로휀의 행방에 관한 단서가 될 만한 내용은 발견하지 못했다.
로휀의 행방에 대한 조사와 더불어 벨린다의 프로그램 제작도 점입가경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미완성인 사자소생 장치는 개선 작업을 하기 위해서 따로 떼어놓은 상태였다. 현재, 벨린다는 순수하게 갈레온을 제어하는 용도를 지닌 자동인형으로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그럴싸한 모습을 보여줄 목적으로 실시하는 감정 반응 기능의 테스트 날짜에 맞춰 벨린다를 조정하던 타이렐에게 소장실로 오라는 오르그렌 소장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타이렐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부유전함 갈레온의 제어용 자동인형인 벨린다 말인데, 조정에 대한 진척 상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조정 테스트는 리니어스 상급 기술관님의 입회 하에 정해진 일정대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실험이나 테스트가 진행될 때마다 보고서를 올렸기 때문에, 당연히 오르그렌도 진척 상황에 대해 파악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진척 상황에 대해 확인하려는 건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일단 현재 상황에 대한 보고를 했다. 벨린다의 프로그램 제작은 당초 예정대로 지연되는 일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타이렐은 개인의 연구를 우선시한 나머지 원래 자신이 해야 할 역할에 소홀해질 정도로 경솔한 사람이 아니었다.
“상급공학사 이오시프님께서 벨린다를 갈레온에 탑재시킨 상태로 테스트해보고 싶다는 연락을 하셨다.”
“갈레온 쪽의 시스템은 완성되었습니까?”
타이렐은 부유전함 갈레온이 수많은 무기와 장비들을 탑재한 대형전함이긴 하지만, 거대한선체를 관리하기 위한 시스템 구축 작업에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전부 완성된 건 아니야. 우선 화기 관제 시스템과 동기화를 하기 위한 조정 작업을 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알겠습니다. 일정은 언제쯤으로 예정되어 있습니까?”
“테스트 일시는 조정 작업 때문에 갈레온 쪽에 맞추기로 했다. 추후에 연락이 오겠지.”
“문제가 될 만한 사항은 없습니다. 갈레온에 탑재할 수 있도록 벨린다를 조정해두겠습니다.”
“알았다. 갈레온 쪽 관계자들에게도 그렇게 전해두도록 하지.”
10일 후, 타이렐은 감찰을 맡고 있는 송과 벨린다를 대동하고 갈레온을 제작하는 로젠부르그의 거대 건조장을 방문했다. 갈레온은 아직건조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지만, 운반되는 부품의 크기로 미루어보아 완성된 후의 크기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타이렐은 벨린다를 작동시킨후, 갈레온의 중추를 담당하는 함교에 대기시켰다.
갈레온의 함교는 화기 관제용 레버와 조타용 콘솔로 구성되어 있었다. 인력을 동원해서 조종을 하려면 여러 명의 전문 오퍼레이터가 필요하겠지만, 갈레온 전용으로 제작되어 고도의 연산기능을 갖춘 벨린다가 운용을 하게 되면 인원을 감축시킬 수가 있었다. 레버의 손잡이 부분에는 벨린다의 손 형태에 맞춘 접속 단자가 구비되어 있었다. 벨린다가 손잡이를 잡으면 갈레온과 동기화가 일어나면서 복잡한 화기 관제 시스템을 레버 하나만으로 다룰 수 있는 형태로 제작되어 있었다. 화기 관제 시스템과 동기화가 시작된 후, 동기화를 실행하던 도중에 에러가 발생했다.
“관제 시스템 정지. 동기화를 중단하라. 타이렐, 벨린다 쪽의 에러 원인을 파악해주길 바라네.”
타이렐은 이오시프의 명령에 따라 벨린다의 전원을 차단한 후, 곧바로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다른 곳에서는 이오시프가 갈레온 쪽의 에러를 찾아내기 위한 작업을 개시했다. 그 후로도 몇 번에 걸쳐서 테스트를 반복했다. 타이렐은 테스트를 거치면서 벨린다에게 갈레온의 정보가 유입되는 순간에 상태 이상이 발생하는 원인을 밝혀냈다.
“이오시프 상급공학사님, 원인이 판명되었습니다.”
타이렐은 모니터에 벨린다와 레버의 단면도를 띄워 놓은 채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레버에서 송신되는 관제 시스템의 정보가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벨린다의 연산 장치가 모두 처리해내지 못하고 과부하를 일으키는 바람에 에러가 발생했던 것 같습니다.”
“갈레온에서 송신되는 정보의 양을 통제할 필요가 있겠군.”
“아닙니다. 갈레온 쪽의 정보를 통제할 경우, 갈레온의 화력이 대폭 감소하는 사태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벨린다의 연산 장치를 개선할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수많은 숙제를 남겨둔 채로 갈레온과 벨린다의 동기화 실험이 종료되었다. 타이렐은 판데모니움으로 돌아오는 비행정 안에서 벨린다의 연산 장치를 개선하기 위한 아이디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너무 열심히 생각에만 몰두하다 보면 정리될 것도 정리되지 않을 걸세. 조금 쉬는 게 어떤가?”
의회의 명령에 따라 감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번 테스트에 동행했던 송이 말을 걸었다.
“벨린다는 아직 개선할 부분이 많아서…”
“흠, 혹시 상태가 영 안 좋은 거라면 제작자에게 연락을 해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제작자를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네. 협정감시국의 맥스를 알고 있나? 맥스를 만든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네.”
「맥스」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도서관에 보관된 자료에 로휀이 개발한 무기와 장비들을 장착한 인물이라는 설명과 함께 맥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 사람이 오토마타였습니까?”
“그렇다네. 우리 의회의 의뢰로 맥스가 제작된 것이라네.”
“그랬군요. 그렇다면 맥스와 로휀이라는 인물 사이에 접점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타이렐은 신중한 태도로 송에게 물어보았다.
“로휀을 알고 있나? 로휀과는 병장국 시절부터 교류가 있었지만, 지상에 내려간 이후로는 어디로갔는지 행방이 묘연하다네.”
“그러시군요. 벨린다에는 그가 만든 이론을 적용시킨 부분이 많기 때문에… 벨린다의 성능 향상이나 후진양성을 위해서라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습니다만.”
송은 의회에 소속된 인물이었다. 신중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로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싶어하는 연구자처럼 보이도록 연기를 하고 있었다.
“흠… 그런 이유라면 나도 로휀의 행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지.”
“가능하시겠습니까?”
“우리 의회에서도 로휀의 거처를 파악해둘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네. 때마침 그 기회가 찾아온 것뿐이라네.”
“감사합니다.”
타이렐은 깊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타이렐은 오로지 벨린다라는 병기를 자신의 최고 걸작품으로 만들어 세상에 선보이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었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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