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렐 R1 3392년 [기이]
깔끔하게 정돈된 밝은 실험실. 그 실험실 한 켠에 실험실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작업대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침대와 비슷한 형태의 작업대 위에 한 인형이 잠든 것처럼 누워 있었다. 타이렐은 콘솔과 모니터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인형의 조정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벨린다, 눈을 뜨세요.”
타이렐은 작업대 위의 누워있는 인형에게 속삭이듯이 말을 건넸다. 벨린다라고 불린 인형이 눈을 떴다.
“몸 상태는 어떤가요?”
“문제 없습니다.”
타이렐은 인형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온 것을 확인한 후,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지시를 내렸다.
“그럼 일어나세요. 테스트를 개시하겠습니다. 리니어스 상급 기술 사관님, 기록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라져, 기록을 개시합니다.”
갈레온의 조타실을 본떠 유사하게 만든 공간에서 베린다의 활동에 대한 모의 테스트를 실시했다. 시뮬레이션은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현장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맞춰 적절한 조정이 필요할 것 같네에. 그렇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조정이 가능한 자동인형에게 탑재시키는 거겠지만.”
실험 상태를 기록하던 리니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시뮬레이션 종료 후, 점검 프로그램의 시험 운행을 실행하겠습니다.”
“조정 부분에 관해서는 벨린다 본인과 갈레온에 탑승하는 기술 사관이 실행하도록 하라는 지시가 있었지이.”
리니어스는 상급 기술 사관임에도 불구하고 엔지니어 특유의 억제된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다. 타이렐이 현재 소속되어 있는 연구소는 리니어스를 필두로 엔지니어 중에서도 소위 [별종]이라고 불릴만한 사람들 투성이였다.
“5일 후에 예정되어 있는 돌발적인 상황에 대한 대응 실험은 문제 없이 실시 될 수 있을 것 같아?”
“네, 프로그램 자체는 완성되어 있습니다. 시운전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문제 없겠네에. 소장님에게도 그렇게 보고할게에.”
“감사합니다.”
타이렐은 소용돌이가 소멸하고 레지멘트 조직이 괴멸함에 따라 현재의 연구소로 이동하게 되었다.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레지멘트에서 장비개발에 종사하던 동기 C.C.가 죽었다는 부고 소식이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특별하게 깊은 관계였던 것은 아니지만, 같은 테크노크라트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앞서 나가던 C.C.는 타이렐의 개인적인 목표이며 넘어야만 할 벽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죽음은 타이렐로 하여금 목표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말았다. 이동 명령에 의해 옮겨온 현재의 연구소는 여러 분야에서 너무 튀는 엔지니어나 판데모니움에서 이루어지는 의사통제의 틀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집합소였다. 유전자 선별은 만능이긴 했지만 전능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연령 대의 엔지니어든 반드시 한두 명씩 [별종]이라고 불리는 인물이 존재했다. 레지멘트 파견 임무는 통제국이 감당할 수 없는 인물들을 판데모니움 밖으로 내보내는 인원정리 목적으로 이용되었었다. 지금은 이 연구소가 골칫거리 수용소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판데모니움은 소용돌이가 소멸한 후에 곧바로 지상을 평정한다는 명목 하에 각국으로 엔지니어의 파견을 개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타이렐이 소속된 연구소에서도 파견 요원을 차출하게 되었다. 통제국에서 부여하는 임무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타이렐은 루비오나 연합왕국을 담당하는 기술 사관으로 취임했다.
“타이렐 기술 사관님, 잠시 살펴봐 주셨으면 하는 물건이 있는데요.”
타이렐은 루비오나에 있는 군수물자 공장에서 열린 미팅이 종료된 후, 공장의 책임자가 부르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네, 어떤 물건인가요?”
“머칠 전에 확장 공사를 실시했을 떄에 출토된 물건입니다만.”
그런 말과 함께 보여준 물건은 작은 메모리 디스크였다.
“디스크네요. 무척 오래된 물건처럼 보이는군요.”
“아마도 황혼의 시대의 산물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제 능력으로는 해석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판데모니움의 힘을 빌렸으면 해서요.”
“알겠습니다. 돌아가는 대로 해석해 보도록 하죠.”
“해석이 완료되면 저에게도 한번 보여주실 수 있나요? 유용한 물건이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럼 이만.”
타이렐은 할당 받은 방으로 돌아가서 디스크의 해석을 개시했다.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처럼 보이는 보호 케이스에서 디스크를 꺼냇다. 디스크에 흠집이 없는지 확인한 후, 데이터의 형식을 조사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그 후로 타이렐은 파견된 곳에서 작업을 하는 틈틈이 디스크의 해석을 진행하고 있었다. 해석을 진행하는 동안 디스크의 정체가 황금시대에 잃어버린 코덱스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건…”
타이렐은 오래 전에 병장국을 이끌었던 로휀을 스승으로 모셨었다. 그 당시에 연구자료의 일환으로서 열람한 적이 있는 [죽은 자의 부활] 코덱스 였다. 그러나 그 코덱스는 전체의 일부분에 불과했고 완전한 코덱스도 아니었다. 루비오나의 공장에서 출토된 물건은 흠잡을 데 없는 완전한 코덱스 그 자체였다. 실제로 죽은 자가 말을 하는 기록도 포함해서 코덱스의 내용을 확인한 타이렐은 두려움을 느끼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소망 하나를 가슴속에 품었다.
- - - 언젠가, 이 [죽은 자의 부활] 코덱스를 완전하게 해석해내고 말겠다. - - -
타이렐은 C.C.를 뛰어넘겠다는 목표에 몰두한 나머지 잊고 있었던 자신의 소망을 기억해냈다.
대략적인 해석 작업이 완료되어 공장의 책임자에게 해석 결과를 알렸다.
“죽은 자를 부활시킨다니. 무슨 설화도 아니고…”
“설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이륙했던 매우 귀중한 연구 성과입니다.”
“그런가요… 그런 귀중한 물건이라면 타이렐 기술 사관님께 드리겠습니다. 우리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니까요.”
결국, 이 코덱스는 타이렐의 수중에 남겨지게 되었다. 원래 코덱스는 소수의 허가 받은 상급 기술 사관이나 통제파 사람들에 의해 엄중하게 관리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열람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범죄가 된다. 그러나, 이 코덱스의 존재를 아는 것은 타이렐과 공장의 책임자밖에 없었다. 공장의 책임자가 정보를 퍼트릴 경우에 대해서도 고려해봤지만, 그의 반응으로 미루어 볼 때 코덱스에 관한 일 자체를 금새 잊어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타이렐은 루비오나 파견 업무가 끝난 후에도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코덱스의 연구를 진전시키고 있었다. 타이렐은 잃어버렸었던 연구에 대한 의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자신의 의지로 진전시키는 연구와 해석이 타이렐의 지식욕을 크게 자극하고 있었다.
코덱스를 손에 넣은 시점부터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 타이렐은 갈레온을 제어하기 위한 자동인형인 벨린다의 제조 작업을 담당하게 되어 그란데레니아 제국으로 파견되었다. 인형의 근원이 되는 인공지능의 제작자는 따로 있었지만 인공지능을 운용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프로그램을 구축하는 것이 타이렐이 맡은 역할이었다. 타이렐은 여러 종류의 시험 운행을 별 탈없이 끝내고 리니어스와 함께 소장에게 가서 시험 운행에 대한 결과 보고를 끝마친 후, 벨린다를 데리고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왔다. 타이렐은 추후의 일정을 확인하고 난 후, 벨린다를 다시 작동시켰다.
“벨린다, 일어나세요. 코드 556의 테스트를 재개하겠습니다.”
타이렐은 [죽은 자의 부활] 코덱스를 토대로 재생시킨 장치를 아무도 모르게 벨린다에게 탑재시킨 상태로 실험을 거듭하고 있었다. 타이렐의 손에는 일부분이 괴사되어 반쯤 썩은 실험용 쥐의 사체가 놓여 있었다.
“사체의 상태를 확인. 소생 약품을 살포하겠습니다.”
기계음성과 함께 벨린다의 손가락 끝에서 약품이 분사되었다.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쥐의 사체를 썩기 직전의 상태까지 재생시키는 것은 성공했지만, 사체는 살아 있을 때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실패로군요. 역시 로휀님을 찾아내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네요. “
타이렐은 벨린다의 전원을 차단한 후, 조용히 혼잣말을 내뱉었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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