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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1~40/루카

(번역본) 루카 R5 3399년 [망향]

*번역지원 감사합니다.

*오류 등의 수정사항은 덧글(comment)나 방명록으로 제보 부탁드립니다.

*일어원본: https://dcunlibrary.tistory.com/1095

 

3399년 「망향」 (望鄕 : 고향을 그리워하다)

흐린 하늘 아래서, 공중에 죽은 자의 목이 날아간다.
은색의 칼끝이 번쩍이고, 되돌아온 칼날이 바짝 다가온 죽은 자의 정수리를 두 쪽 냈다.

한창 젊었을 적의 그 힘은 진작에 잃어버렸다. 전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된 몸, 한때 용맹하고 과감했던 그런 싸움을 재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몸은 늙고 쇠했을지언정 그 눈동자에는 여전히 강철같은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아직…. 질 수는 없다."

루카는 한숨 돌릴 새도 없이 몰려드는 죽은 자의 군대를 노려보았다.
그의 마음에 있는 것은, 단 하나.
고향에 돌아가 체제를 정비하고 이 상황을 뒤집는 것. 단지 그뿐이었다.

루카가 프로비던스를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갈레온을 폭파하고 거의 한 달이 지난 뒤였다.
죽은 자의 군대에 철저히 유린당한 프로비던스에 남아 있던 것은 '어떤 일'로 인해 움직이지 못하게 된 죽은 자들과 살아있는 시체가 되다 만 인간들의 유골뿐.
코루가의 성수(성스러운 짐승)는 어느새 모습을 감추고 없었지만, 그 자신의 사명 또는 무언가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딘가로 떠난 것이라고 루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돌아가야 한다."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한 고요한 폐허에 루카의 쉰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루카는 홀로 메르츠바우를 향한 여정에 올랐다. 함께 갈 만한 신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아직 남겨진 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백성을 위해 돌아가야만 한다고 다시 힘을 내본다.
프로비던스 공략에 맞춰 쌓아 올린 병참 기지에 남아 있던 오토 호스를 운 좋게 가동할 수 있었으므로 바로 짐을 싣고 메르츠바우를 향해 말을 달렸다.

프로비던스에서 말을 타고 달린 지 일주일.
루카의 여정을 비웃듯 전혀 맑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거무칙칙한 하늘 아래, 루비오나 연합왕국의 왕도 아발론이 보이기 시작했다.

들어가기 직전, 사지로 향하는 병사들을 고무시키는 듯한 행진으로 가득했던 풍경은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왕도에 산 자의 기운은 없었고, 루비오나의 번영의 상징이었을 터인 왕성에 떠도는 것은 죽음의 냄새뿐.

알현의 방도, 대신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가득했던 대회의실도, 정치가나 귀족, 사용인이 빈번히 오가며 한때 번창했던 왕성도, 그 모든 것이 처참히도 황폐해져 있었다.
복도에 수두룩한 혈흔과 탄흔, 무너진 벽, 박살 난 유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성에서 벌어진 참상을 이야기한다.
“아무도 없는 것인가….”
아무도 없는 알현의 방에서, 루카의 목소리는 덧없이 울림을 잃어갔다.

수년 전, 아직 어렸던 알렉산드리아나 여왕의 즉위식을 갑작스레 떠올린다.
선대 여왕 아우구스테가 서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다부지게 행동하며 식전을 거행한 천진난만한 소녀.
요 수년간 전란에 의해 불평할 틈도 없이 나라를 이끌 여왕으로서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무사히 피신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지금 그것을 알 방법은 없는 데다, 아무도 없는 왕성을 홀로 돌아다닐수록 무엇도 누구도 남아 있지 않다는 현실만이 루카 앞에 내던져질 뿐이었다.
얼마 남아 있지 않던 보존식량과 물을 빌리듯 챙긴 뒤, 왕도 아발론을 떠나는 것 외에 루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토 호스를 타고 폰데라트의 국경을 넘는다.
루비오나와 폰데라트를 잇는 교역 가도를 달리는 것은 루카와 오토 호스뿐이다.
이곳을 빈번히 오가던 상인들의 짐마차나 스톰라이더의 모습도, 나라를 오가던 백성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가도에는, 죽은 자의 군대로 변한 자들의 사체와 죽음의 군대에 합류하지 못한 인간과 동물의 유해만이 널려 있을 뿐이었다.

“전부, 죽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인가.”
그저 적막과 죽음만이, 국가는 물론 세계 그 자체를 뒤덮어버렸다.

“소용돌이”가 세계를 공포로 지배하던 시절에조차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살아왔다.
사람 간의 분쟁이나 소용돌이, 마물과의 싸움, 그 어떤 싸움 속에서도 사람들은 미래를 위해 살아왔는데 지금은 그 잔재조차 알아볼 수 없다.
참으로 다양한 싸움을 경험해온 루카였지만 이렇게까지 “생명”을 포착할 수 없는 싸움은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나 평화를 바라고 풍족을 바라며, 그를 위해 기도하고 투쟁하며 살아왔다. 그랬을 터였다.

오토 호스를 덮치려 드는 죽은 자를, 은의 번쩍임으로 틀어막는다.
몸과 머리가 분리된 시체는 무너져내리고 그 위를 또 다른 죽은 자가 밟고 지나간다.

늙어서도 맑은 검기가 그에게 들러붙으려는 죽은 자의 군대를 떨쳐내고 길을 뚫는다.
지켜야 할 국가도, 신하도, 아내와 자식조차 잃었음에도, 그 검은 루카와 함께 했으며 항상 그의 힘이 되어 주었다.
지금, 루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의 검기와 두뇌뿐.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루카는 나아가야만 했다.
그래도, 루카는 마음을 다잡는다. 루카의 눈동자에는 아직 생기가 깃들어 있다.
죽음을 무릅쓰고 그를 살린 젊은이들의 소원을 헛되이 할 정도로 루카의 마음은 타락하지 않았다.
죽은 자의 군대를 물리치고 더욱 오토 호스를 달리게 하여, 드디어 그리고 그리던 메르츠바우의 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와도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은 진작에 황폐해진 세계뿐이었다.

극동에 자리한 덕분에 “소용돌이”의 위세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던 메르츠바우였지만, 죽은 자의 군대에는 결국 당해내지 못한 것이다.

사람의 기척이 없는 고향의 대지를 오토 호스의 말굽이 즈려밟고 지나간다.
죽은 자의 군대도 사람의 유해도 없다. 그저 문명의 흔적만이 남은 고향의 모습에 루카는 낙담을 감출 수 없었다.

“그때, 이미 우리들의 싸움은 끝나버렸던 것일지도 모르겠군.”
자신 외에 들을 자 없는 말이 입술에서 흘러나온다. 루카는 새삼스레 깨닫고야 만다. 그란데레니아 제국과 루비오나 연합왕국 간의 전쟁은 트레이드 영구요새에 죽은 자의 군대가 나타난 시점에서 이미 끝났던 것이라고.

다만, 설령 그것을 눈치챘다 하더라도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때 수도 판데모니움에 사태를 조사해달라고 의뢰했더라면, 그란데레니아 제국에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했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적어도 죽은 자의 군대에 의해 사람들이 무참히 유린당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했더라면’ 이나 ‘그랬을지도 모른다’ 같은 건 이제 탁상공론보다 못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루카의 눈앞에 광대히 펼쳐진 것은, 죽은 자의 군대에 인류 그 자체가 거의 패배했다는 사실뿐.

성 아랫마을로 발을 옮겨보아도 변하는 건 없었다. 아발론에서도 폰데라트의 수도에서도 보았던 황폐한 광경만이 눈에 비칠 뿐이었다.
루카의 비호 아래 있었을 터인 시장에는 과일이나 채소가 완전히 말라버린 채 그냥 나뒹굴고 있었다. 석조 타일로 정돈된 길은 언제나 활기 넘치고 사람으로 북적였지만, 이제 사람은 그림자조차 없었으며 바람만이 쓸쓸히 지나갈 뿐이다.
여기저기서 흥겨이 울려 퍼지던 음악도, 웃음소리도, 지금은 그저 멀고 먼 기억이 되고야 말았다.

오토 호스를 왕성의 정원에 멈춰 두고, 아무도 없는 성에 홀로 들어간다.
“아무도 없는가?!”
루카가 목소리를 크게 내 보지만, 응답하는 것은 침묵뿐이다.
왕의 귀환은, 죽음이 몰고 온 정적으로 환영받았다.

아무도 없는, 그러나 익숙한 복도를 걸으며 자신의 집무실로 향한다.
마루를 밟는 감촉도 소리도, 나가기 전과 무엇 하나 변한 게 없는데, 그 소리를 울리는 것은 루카밖에 없었다.

집무실의 문을 열자, 나가기 전과 변함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 아아.”
루카는 그 광경에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죽은 자의 군대에 의해 황폐해진 세계에서, 자신의 기억과 무엇 하나 다르지 않은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사용감이 있는 중후한 책상 위에는, 대신들이 놓고 갔을 날인 없는 승인서류가 있었다.
루카는 평소처럼 의자에 앉고서, 책상 서랍에서 애용하던 안경을 꺼내 착용했다.
모든 게 평소대로였다. 루카의 주변만이 시간이 되돌려진 것처럼, 너무나도 일상적이었다.

손에 펜을 쥐고, 서류의 내용을 두 번 확인한 뒤 사인하고, 날인 후 정해진 봉투에 넣어둔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고요함에 에워싸였음에도, 이전과 무엇도 변하지 않은 메르츠바우 대공의 일상이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다.

“후우...”
얼추 서류에 사인을 다 끝낸 루카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납처럼 어둡고 무거운 색깔이 하늘을 점령하고, 지금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조금, 쉬도록 할까.”
루카는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빈 뒤, 커다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눈을 감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갖는다.
루카의 의식이 어둠에 잠기려는 그 순간, 아득히 서쪽 하늘 너머에서 커다란 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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