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 장면이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그룬왈드 R1 3392년 [외로운 그림자]
―론즈브라우 왕국 시내―
차가운 석조 바닥 위에서 여자는 죽어 있었다. 여자는 어깨에서 가슴 한가운데까지 깊게 베어져 있다. 피는 석조 바닥 위를 지나 갓길까지 흘러내리고 있다. 옆에 서 있는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자의 창백한 얼굴의 입가에 번진 피는 희미한 불빛 속에서도 매우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남자는 잠시 그곳에 서 있었다. 검은 외투와 후드에 가려진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거리의 시간은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달빛은 없었다. 이윽고, 검은 옷의 남자는 유령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브론하이드 성―
“그래서?”
왕자의 말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옥좌에 앉은 그룬왈드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수도 안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신하와 백성들이 매우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제발 더 이상은…….”
대대로 왕실을 섬겼던 충신인 가이우스경이 말을 잇지 못한다. 전대미문의 사건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재 론즈브라우 왕국에서는 병상에 있는 늙은 왕을 대신하여, 이 젊은 왕자인 그룬왈드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가신들이 그 권력의 주인인 왕자에게 수도 내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그만두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원래 왕국에는 그룬왈드 이외에도 왕위 계승자에 해당하는 형이 두 명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룬왈드는 왕의 노여움을 사 추방당했었지만 몇 년 전에 돌아왔다. 추방을 당했던 이유도 그룬왈드의 기괴한 행동과 성격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동물의 사체를 모아 땅에 묻거나 뼈를 발라내어 방에 장식했었다. 사형당한 죄수의 시체를 갖고 싶어하기도 했다. 유모들은 그런 왕자를 저주받은 아이라고 수군대며 아무도 그의 시중을 들려 하지 않았다. 형이나 왕이 그 행동에 대해 혼을 내도 기괴한 행동은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죽인 것으로 보이는 시체가 수십 구나 발견되어 왕국에서 추방된 것이었다.
“이 사실은 반드시 왕께도 보고 드릴 것입니다.”
가이우스는 간신히 쥐어짜 낸 목소리로 왕자에게 말했다. 가이우스는 체념하고 있었다. 이 왕자는 추방당하던 때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추방당할 당시, 왕은 몇 번이나 그룬왈드에게 물었다. 왜 죽인 것인지,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지. 그때도 전혀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에 왕은 절망하여 그를 추방했던 것이다.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긴박한 상황에서 사이에 끼어든 것은 궁전에서 학자로 오랜 기간 종사해온 로휀이라는 남자였다. 여든이 넘은 앙상한 몰골의 노인이었지만, 그 눈빛만은 서방에 이름을 떨치던 공학사 시절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저희 가신들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부디 무분별한 짓을 삼가 달라는 말씀입니다.”
선선대의 왕 때부터 왕을 모셔왔던 노인은 다른 가신과는 다른 말투가 허용되고 있었다.
“그란데레니아가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문은 이곳에도 자자합니다. 전란의 때가 머지않았다고 나라를 넘나들며 여러 가지 권모술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지금은 변화의 시대입니다. 세계는 혼돈의 속박에서 해방되었고, 각 나라는 지상의 영토 싸움을 재개하기 위해서 군사정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전란에 우리 왕국도 반드시 말려들게 되겠지요.”
로휀은 잠시 숨을 돌리고 가신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나라를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도 헤아려 주세요.”
늙은 가신의 말을 듣고도 변함없는 왕자의 모습을 보다 못한 가이우스경과 다른 가신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옥좌 앞에서 물러났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로휀은 혼잣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선과 악, 밝은 태양 아래서는 알기 쉬워서 좋네.”
―암흑의 길―
그룬왈드는 성을 빠져나와, 자정이 지난 깊은 밤에 성 아래쪽의 거리로 나왔다. 이 성에는 그룬왈드만이 아는 샛길이 많이 있었다. 그는 이 오래된 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고독했던 그에게 오래된 성의 숨겨진 통로와 지하 감옥은 어느 곳보다도 편안한 장소였다. 밤의 축축한 공기가 폐로 들어오자 그룬왈드는 그 욕망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잠시 눈을 감고 욕망의 맛을 음미한 후, 외투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술집과 홍등가가 모여 있는 대로까지 나와 골목의 후미진 벽에 기대어 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따금 술에 취한 매춘부 일행이 그의 앞을 지나간다. 하지만 누구도 그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룬왈드는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술집에서 나온 여자가 대로변에서 벗어나 반대편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룬왈드도 천천히 그녀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사람들이 붐비던 대로에서 벗어나 가로등도 별로 없는 골목길로 걸어갔다. 골목을 걷고 있는 여자에게 검은 그림자가 다가간다. 여자는 아직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했다. 그림자가 여자 뒤에 다다르려는 찰나, 그림자와 그림자가 부딪쳤다. 검이 바닥에 떨어진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서 있는 것은 검을 빼어 든 그룬왈드. 여자를 덮치려 했던 남자는 두 번째 공격을 피하려고 거리를 벌렸다. 남자의 체격은 검은 왕자와 매우 닮아있었다.
“널 찾아다녔어.”
남자는 상대가 왕자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 같았다. 자세를 잡은 남자가는 윗옷의 단추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있었다. 체격이나 자세로 미루어보아 남자가 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뽑기 전에 생각해봐.”
그룬왈드가 기선을 제압하듯이 말을 내뱉었다.
“너는 무엇을 원하지?”
남자는 왕자의 이상한 질문을 무시하고 상의를 들어 올리며 총을 뽑는다. 한 줄기 섬광이 지나간 후, 남자의 목은 깨끗이 잘려 떨어졌다. 남자의 몸이 총을 쥔 채로 쓰러진다. 선혈이 바닥을 적신다. 순간 그룬왈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밤거리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룬왈드는 남자의 목을 상의로 감싸 들고 일어섰다.
―지하실―
문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룬왈드는 힘차게 그 문을 연다. 그곳에는 기묘한 기계에 둘러싸인 채 앉아있는 로휀의 모습이 보였다. 늙은 현자는 거대한 돋보기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전하, 갑작스러운 방문이시군요.”
“이 녀석에게 듣고 싶은 것이 있어.”
그룬왈드는 이상한 장치와 낡은 가죽 책으로 어질러진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목을 올려놓았다.
“오랜만이군요. 다시 그 일을 하시는 건가요."
로휀의 눈에 섬뜩한 생기가 깃들었다.
“이건 너의 실험대상이 아니야. 이놈은 성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살인사건의 범인이다.”
“호오. 그렇군요. 그 일은 당신이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는 말씀이군요. 이것 참 의외인데요.”
노인은 천천히 일어섰다.
“쓸데없는 농담은 집어치워. 머리가 썩어버린다고.”
“말씀 안 하셔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디에 넣어 두었더라…….”
로휀은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책과 이상하나 기계가 늘어선 방을 헤치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룬왈드는 선반으로 변해버린 긴 의자에 있던 잡동사니를 치워버리고 앉았다. 그리곤 사건의 진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깊은 생각에 잠겼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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