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훼손, 자해, 캐릭터 사망 장면이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워켄 R5 3392년 [경계]
암흑 속에 빛줄기가 쏟아져 내려왔다.
“미아, 워켄. 좋은 아침.”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마스터.”
이번에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미아. 워켄, 너도 그만 일어나거라.”
남성이 자신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사람은 마스터다. 나는 눈을 통해 영상 정보가 들어오자마자 즉시 해석하고 이해했다.
“마스터,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말을 하긴 했지만, 말 이외에 다른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그래 좋은 아침이구나, 워켄. 기분은 어때?”
마스터가 내 눈 속에 담긴 감정을 헤아려보려는 듯이 관찰하는 태도로 질문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마스터.”
미아라고 불린 여성이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마스터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명령… 그래, 너희는 이제 막 눈을 떴으니 저택을 산책해보는 건 어떨까?”
마스터는 잠시 생각한 후에, 나와 미아에게 산책을 해보라고 말했다. 나와 미아는 정성 어린 손길로 정갈하게 관리된 저택 내부를 걸었다. 대화는 없었다. 대화를 나누라는 명령은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돌아왔구나. 처음으로 자신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계는 어땠어?”
우리는 저택의 구석구석까지 살펴본 후에 마스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마스터는 우리를 미소로 맞이해주었다.
“죄송합니다. 명령하시는 의도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마스터, 다시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감상을 들려주길 원하고 있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우리는 마스터가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와 미아는 명령이 아닌 질문에 대처하는 방법을 몰랐다.
“흠… 인식 루틴에 문제가 있는 건가? 아니면 단순한 학습 부족인가…”
마스터는 우리의 반응을 확인한 후, 깊은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우리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일까?'
그런 감정이 샘솟았지만,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마스터,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그래, 어디 보자. 일단 너희는 내 조수가 되어 나를 도와라.”
그 이후로, 나는 미아와 함께 마스터의 연구를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마스터는 우리의 전자두뇌에 정보를 직접 입력하는 간단한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우리에게 연구의 세부 내용을 몸소 가르쳐주는 방식을 선택했다. 우리는 인간이 학습하는 과정과 동일한 방법으로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미아, 워켄. 너희는 이제부터 다시 태어날 것이다.”
마스터는 특이한 인공지능을 지닌 「스테이시아」의 데이터를 토대로 만든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완성한 후, 침대에 누워 있는 나와 미아에게 그런 말을 했다. 나와 미아는 그 새로운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로 업그레이드 될 예정이라고 했다.
“실험이 성공한다면 너희는 더욱 뛰어난 지성과 창조성을 얻게 될 것이다. 너희는 자신의 두뇌를 이용하여 자발적으로 생각하고,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는 오토마타가 될 것이다.”
암흑 속에서 마스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는 내 기억 깊은 곳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주 고귀한 일이다.”
워켄은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아수라장의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주위에는 파괴된 건물과 치솟는 화염, 정신없이 도망치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러나 워켄은 주위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거운 몸을 질질 끌면서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몸 속의 전자 회로가 거의 다 타버린 상태였지만, 미아가 있는 곳으로 가야만 한다는 일념이 워켄을 움직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처참한 상태로 얼마나 걸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계속해서 걷던 끝에 여러 개의 텐트가 무너져버린 잔해 더미와 부서진 오토마타들이 나뒹구는 장소에 도착했다.
“미아, 미아…”
워켄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미아의 이름을 되뇌면서 잔해 주변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마치 속이 들여다보일 것 같이 투명하고 새하얀 피부를 지닌 왼팔을 발견했다. 왼팔을 발견한 장소의 앞쪽 부근에서 부품 조각들과 윤활유가 땅바닥에 떨어진 채로 어디론가 이어지는 흔적을 찾아냈다. 윤활유 자국을 따라가 보니, 머리 뒷부분이 파괴되고 동체의 일부가 사라진 미아의 잔해가 놓여 있었다. 완벽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고, 기계 부품이 드러난 채로 윤활유를 뿜어내고 있었다.
“미… 아…”
회로가 거의 다 타버리는 와중에도 용케 남아있던 보조 기구가 작동하며 워켄의 감정 기능에 동요를 일으켰다. 분노와 슬픔이 워켄의 모든 감정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쉐리의 기억을 확인한 워켄은 자기 자신을 황제라 칭하는 남자가 보여준 처참한 광경 때문에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감정의 근원이 되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극심한 두통이 가시면서 통증이 사라졌다. 두통의 잔재를 떨쳐내려는 듯이 머리를 흔들자, 사지와 머리가 절단된 상태의 쉐리와 기능을 정지시킨 상태로 침대에 눕혀둔 도니타가 시야에 들어왔다. 도니타와 쉐리의 얼굴이 미아와 겹쳐졌다. 둘의 얼굴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미아의 얼굴과 매우 닮아 있었다.
“그래… 미아…”
워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워켄은 그녀들의 얼굴을 본 순간, 마침내 도니타와 쉐리를 만들었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 창조성과 지성을 겸비한 인간과 동일한 수준을 갖춘 존재인 미아. 미아와 같은 사명을 짊어진 자신이 미아를 다시 만들어내서 마스터의 못다 한 염원을 이루겠다. -
워켄은 기억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명을 완수하려고 했었다.
“도니타, 일어나렴.”
워켄이 도니타를 작동시켰다.
“모두 기억났어! 왜 너희를 만들었는지.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닥터, 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조바심을 내던 워켄은 열이 나서 헛소리를 하는 사람처럼 도니타를 향해 쉴 새 없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워켄은 도니타의 상태가 눈을 뜨기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미아를 빨리 부활시켜야만 한다는 본능이나 다름없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서둘러야만 해.”
워켄은 쉐리를 수리하려고 서두르고 있었다.
“그럼, 거기서 지켜보면 되겠네요. 이러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어요.”
“뭐라고?”
그제야 비로소 워켄은 도니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니타의 손에는 자신의 배에서 잡아 뽑은 케이오시움 배터리가 쥐어져 있었다.
“무슨 바보 같은 짓을…”
워켄은 도니타를 정지시키려고 콘솔로 향했다. 하지만 워켄이 콘솔에 도착하기 전에 도니타가 워켄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이러면 모두가 행복해요.”
도니타는 눈을 크게 뜨고 웃고 있었다. 워켄에게는 도니타의 그 표정이 인간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미아의 표정과 겹쳐 보였다. 그 표정을 보며 감회에 젖을 겨를도 없이 모든 것이 송두리째 눈부신 섬광에 휩싸였다.
“하아,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네.”
노엘라는 폐허처럼 변해버린 연구실에서 간신히 형태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심한 손상을 입은 워켄의 머리를 주워들었다.
“발견했나?”
인공 피부와 머리카락이 처참하게 타버린 채로 간신히 인간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머리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던 순간, 갑자기 노엘라의 눈앞에 새하얀 여성이 나타났다.
“틀림없어. 하지만 노이크롬, 이 아이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
“신경이 쓰이나?”
“조금 마음에 걸리네. 나에겐 남동생 같은 존재이기도 하고.”
노엘라는 워켄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면서 노이크롬의 질문에 대답했다.
“이자는 물론이고, 이자가 만들어낸 자가 알고 있는 정보가 필요하다.”
“나 혼자서 전자두뇌의 복원 작업까지 진행하는 건 불가능한데.”
“문제없다. 방법은 마련해 놓았다.”
“그래. 그럼 그 방법을 마련해 두었다는 장소로 옮기도록 할까?”
노엘라는 불에 탄 채로 남아 있는 연구소의 기기들과 워켄의 일부분이었던 부품들, 그리고 워켄이 만든 작품처럼 보이는 것들을 연구소 바깥에 세워 둔 짐마차에 옮겨 실었고, 노이크롬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잔해들 가운데에는 여성형태의 자동인형처럼 보이는 부품도 있었다. 그 부품이 노엘라의 눈길을 끌었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사라지고 인간과 기계는 서로의 모습을 모방하게 될 것이다.」라고 마스터가 자주 말했었지.”
노엘라는 부품들을 회수하면서 자신의 창조주가 했던 말을 입에 담았다.
“기계이면서도 인간이 된 이 인형은 올바른 세계를 만드는 초석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도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당신이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지?”
“그래. 뒤틀린 인과가 바로잡히게 되면, 너와 나도 올바른 존재로 승화될 것이다.”
“그 말, 믿어 보겠어.”
노엘라는 노이크롬과 대화를 나누면서 워켄의 머리를 완충 소재로 감쌌다. 그리고 내구성이 높은 상자 속에 넣어서 마지막으로 짐마차에 실었다.
“이제 전부 다 실은 건가?”
“아마도 그럴 거야. 자, 이제 어디로 가면 되지?”
“네가 가지고 있는 단말기로 위치 정보를 보내겠다.”
노엘라가 들고 있던 작은 디바이스에 불이 들어왔다. 노엘라는 그 정보를 확인하고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이곳은… 당신, 그런 사람까지 이용하는구나.”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계획에 동조하는 협력자다.”
“그래? 뭐 별 상관없겠지. 그럼 거기서 합류하자.”
노엘라는 짐마차의 마부석에 올라탄 후, 노이크롬이 서 있던 장소를 바라보았다. 노이크롬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노엘라는 한숨을 한번 내쉰 후, 짐마차를 몰고 제도 파이드를 향해 떠났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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