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 R1 3373년 [혁명가]
해가 저문다. 라울은 손조차도 잘 안 보이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작업공들과 함께 도로 복구공사를 이어나갔다. 이날은 라울을 포함한 3명이 복구 작업을 하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작업량과 인부의 수가 맞지 않았다. 그런데도 조직 측은 야간 공사에 조명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조직 우두머리의 말에 의하면, 시에서 이런 사업에 들어갈 예산을 점점 삭감해 다른 부분에서 경비를 절감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원 참, 이게 끝날 리가 없잖아."
"애초에 말이지, 세 명이서 오늘 안에 어떻게든 하라는 게 이상한 거지."
두 명의 작업공이 투덜거리는 동안에더 라울은 잠자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어찌어찌 그 날의 공정을 마무리 짓고 라울 일행은 언제나 들르는 술집으로 향했다. 빈곤한 생활을 술로 달래는 건 언제나 있는 일이었다. 가게에 들어가자 평소에 보지 못했던 남자들이 홀 한 켠을 점거하고 있었다. 황야에 사는 스톰라이더러처첨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어, 작업복 차림의 남자들이 과반수인 이 술집에서는 매우 눈에 띄었다. 라울은 잠시 당황했지만, 동료들에게 이끌려 자리에 앉았다. 곧 꽤 면식이 있는 웨이트리스가 라울 일행의 자리에 주문을 받으러 왔다.
"주문은? 매번 하던 걸로? 아니면 다른 걸로 할래?"
시원시원 말하는 쾌활한 이 여성은 이 가게를 운영하는 집 딸이다. 라울과는 어렸을 때부터 왕래가 있었다. 대강 주문을 하고 나서 라울은 그녀에게 스톰라이더로 보이는 무리에 대해 물어본다.
"레티, 저 사람들 누구야? 여기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우리도 뭐가 뭔지....... 고모가 데려오셨다는데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고모가?"
"응, 아 그렇지. 너한테는 말한 적 없었네. 아빠의 누나 분이신데, 스톰라이더 가문과 결혼했었어."
"그렇군. 그래서 그 고모가 남편분 일행과 돌아오신 건가."
"어, 그렇다고 할 수 있나??"
레티는 뭔가 어물쩍하게 말했다. 그녀도 갑자기 집으로 돌아온 고모 때문에 많이 놀란 것처럼 보였다.
"레티! 주문!"
"네! 미안, 이따 보자."
다른 테이블에서 주문이 들어오자 레티는 황급히 달려갔다.
푸념을 안주 삼아 싸구려 술을 마신다. 어떻게 보면 현실도피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루하루의 울적함을 풀 길이 없었다. 오락시설도 시의 예산 부족을 이유로 그 수가 감소했고 남은 시설들도 가격을 인상해 일부 부자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렸다.
"나, 역시 이번 데모에 참가할까. 라울은 참가한다고 그랬지?"
"어.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라울은 끄덕였다. 모레 아침부터 증세 등에 반대하는 데모가 열릴 예정이었다.
라울이 사는 도시는 유수의 대형장벽을 가지고 있는 인페로다 왕국에 속해있었다. 인페로다 왕국은 원래 장벽을 생산하는 공업 도시였다. 그 때문에 현재는 생산할 수 없는 황혼의 시대의 유산인 고성능의 소형장벽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그 장벽의 혜택을 받으려고 하는 중간 규모의 도시를 흡수해 가며 국가를 형성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시대가 지남에 따라 인페로다를 다스리는 왕족은 부패해 가고 있었다. 장벽이 가져다주는 이익은 국가를 위해 사용되지 않고, 왕족의 편의를 위해 움직이는 관리들이나 귀족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시민들에게 부과된 세금은 늘어만 가는 것에 반비례해 시민들에게 돌아오는 돈은 줄어들었다. 시민들의 울분은 쌓여만 가고 있었다.
"데모 같은 걸 한다고 해도 관리 놈들한테 전달될 것 같지도 않고. 쓸데없는 짓 같은데."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잖아?"
"그렇다고 해서 하이덴 놈들처럼 되고 싶지는 않은데."
시민들의 울분은 약 3년 전 하이덴 주에서 폭발했다. 주 정부는 왕정의 명령에 따라 반란을 일으킨 시민들을 '폭동진압을 위해 부득이하게 살해'하면서 다수의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언젠가 정부도 알아줄 거라고 생각할 시기는 지났어. 행동은 할 수 있을 때 하고 싶어."
이대로 힘든 생활을 보내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라울은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일환으로 데모에 참가하려던 것이었다.
"합석해도 되겠나?"
스톰라이더 같은 풍채의 남자가 라울이 있는 테이블로 왔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려서 말이지. 빈손으로 온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이 술집에서 나름 비싼 축에 속하는 술병을 내밀었다.
"아니, 재밌는 이야기 같은 건......"
"그런가?"
하루하루 피곤함에 찌들어 있는 작업공과는 달리, 두 눈에 광채가 돌았다. 자세히 보니 아직 젊었다. 라울에게는 자신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데모 이야기 밖에 안했습니다만......"
"그거야.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줬으면 하네."
"이런 술을 대접해 줘도 푸념 밖에는 할 말 없는데?"
"상관없네."
라울 일행은 유별난 말을 하는 이 남자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평소에는 마실 수 없는 술을 제공해 주는데 마다할 담력도 없었다. 라울 일행은 이상한 남자를 자리로 맞이했다.
"데모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파란타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비싼 술을 아낌없이 라울의 테이블에 제공했다. 술을 대접하면서 무심한 말투로 데모의 내용을 물어왔다.
"나도 확실히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백 명 정도 된다고 들었다."
라울은 술에 만취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데모의 정보를 파란타인에게 말한다.
"그렇군. 데모의 주도자는 어떤 인물이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잘 모르는 사람의 데모에 참가하는 건가?"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
"일은 점점 늘어가는 데 임금은 그대로야. 세금은 계속 오르기만 하고. 이제 한계라고."
권하는 족족 술을 마시며 시의 행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라울 일행을 파란타인은 그저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째서 데모에 참가하겠다고 결심한 거지?"
한참을 라울 일행의 푸념과 불만을 듣고 있던 파란타인이 입을 열었다."
"이제 데모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까."
"마구잡이로 폭력에 기대도 무장한 병사들에게 죽임당할 테고."
하이덴 주에서 일어난 폭동진압 뉴스는 반란을 생각하고 있던 시민들을 위축시키는 데 충분했다.
"그렇지. 하지만 데모만으로는 무의미하지 않겠나?"
"당신, 시비 거는 거야?"
갑자기 돌아온 부정적인 대답. 라울 일행은 술기운에 이끌려 시비조가 된다. 파란타인이 이 이상 부아를 돋우는 말을 한다면 싸움으로 발전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시를 향해 데모를 해봤자 왕족 녀석들한테는 닿지 않는다네."
"왕족은 관계없잖아? 우리는 세금이 오르는 걸 막고 싶을 뿐이야."
"그럼, 그 세금이 오르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나? 나라를 움직이는 왕족 아닌가?"
"수도까지 가서 데모하라는 거야? 헛소리 하지 마."
"시를 바꿀 수 없다면 나라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지. 내 말이 틀렸나?"
파란타인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라울 일행에게 말을 높인다. 정신을 차리자 술집에 있던 모든 사람이 마른침을 삼키며 라울 일행이 있는 자리를 바라본다.
"어떻게? 이번 데모도 백명 정도 모이는게 한계라고 들었는데."
라울은 파란타인에게 묻는다.
"그럼 그 백 명의 데모집단이 열 무리가 모인다면 어떻겠나? 스무 집단. 오십 집단. 나라 곳곳에서 데모할 자들을 모은다면 어떻게 되겠나?"
"더 규모가 큰 데모가 되겠지?"
"아니. 그렇지 않다네. 봉기한 시민들이 5천 명이 넘는다면 그건 병사가 되네. 군대가 될 수 있다고. 그럼 나라와 싸워 나라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네."
라울은 파란타인과 시선을 마주친다. 예리한 안광은 도저히 같은 연배의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게 가능한 건가?"
"가능해. 아니, 어떻게든 해야만 하네. 그러기 위해서는 협력자가 필요하지. 나라를 바꿀 의지를 지닌 전사가."
"그것을 지휘하는 건 당신이라는 건가?"
"그렇네. 내가 군을 지휘하고 나라를 바꾸겠네. 나와 함게 나라를, 시민들을 구하지 않겠는가?"
강한 어조로 파란타인은 말했다.
"그걸로 나도 다른 사람들도 구할 수 있다면, 나도 협력하고 싶군."
"나, 나도!"
라울의 답에 연이어 주위 사람들도 차례차례 찬성의 뜻을 나타낸다. 파란타인의 말에 술집에 있던 시민들이 움직였다.
"당신,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라울은 달아오른 술집 사람들을 보며 파란타인에게 묻는다. 스톰라이더같으면서도 스톰라이더 같지 않은 이 남자의 정체가 뭔지 신경이 쓰였다.
"나 말인가? 나는 평범한 남자라네. 하지만 세간에서는 나를 혁명가라고 부르더군."
"혁명가......"
그것이 라울과, 마침내 '불굴의 투사'라는 이명으로 인페로다에 이름을 떨쳤던 남자, 파란타인의 첫 만남이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