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살해 장면이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제드 R1 3390년 [어머니]
제드는 마루 바닥에 앉아, 누워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피가 마루 바닥으로 스며들어 간다. 검은 피 웅덩이에 비치는 얼굴의 입가에는 안도의 웃음이 스민다.
"빨리해!"
어머니의 꾸중에 흠칫 놀란 제드는 몸서리 치며, 물을 길으러 우물로 간다. 손에는 감각조차 없다. 겨울이다. 제드의 어머니는 어젯밤에 미리 해 두어야 했을 일이라며 7살에 불과한 그를 마구 때렸다. 어미 늑대가 새끼의 미래를 위해 매몰차게 내치는 그러한 느낌의 것은 분명 아니었다. 묘하게도 부어오른 머리에 지끈지끈 올라오는 열과 상처의 아픔은 매서운 추위에 조금 누그러진 듯 해 다행이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먹어본 적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적어도 일주일은 넘은 듯 하다. 제드는 비틀거리며 물긷는 곳으로 향한다. 한겨울의 새벽녘, 물 긷는 곳은 정적만으로 가득하다. 순간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제드는 물을 길은 통을 팽개치다시피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팽겨쳐진 통을 옮길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제드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뿌옇게 흐려진 눈에는 망령과 같은 할머니가 비쳤다.
"업보구나."
할머니는 제드의 이마에 집게손가락을 가져다대며 말했다. 제드는 당장에라도 저 기분 나쁜 손가락을 내쳐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제드는 이 할머니가 정말로 이곳에 있는지, 아니면 자신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인지, 꿈인지, 현실인지 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 한들 몸을 움직일 기력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 더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자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천천히 몸을 추스리고 일어나 물통을 질질 끌며 집으로 향한다. 남은 힘을 내어 집에 다다르자마자, 순간 의식을 잃으며 넘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집의 문에 의지해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어머니가 서 있었다. 그녀는 길러온 물을 옮기려는 제드의 손에서 통을 낚아챈 후 발로 차 넘어뜨렸다. 힘없이 작은 몸은 문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
"어디서 뭘 하고 오길래 이리 늦은 거야?! 쓸모없는 굼벵이 같으니라고! 너 같은 병신에게 줄 밥은 없어!"
"죄송해요, 어머니......"
제드는 퍼붓는 욕설에 간신히 일어나며 대답했다.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화내는 어머니의 얼굴은 정말이지 볼 수가 없었다.
"뭐가 죄송한데?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면 행동으로 보여!"
어머니는 문을 열며 제드의 팔을 잡아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거기서 반성해!"
그리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을 닫아버렸다. 차가운 길바닥에 내팽개쳐진 제드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너무 추워서 견딜 수가 없다. 문을 향해 기어가 손잡이를 잡고 몸으로 밀어 보지만 문은 미동조차 없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기력이 다 한 제드는 주저앉는다. 손과 몸의 떨림을 멈출 수 없는 통제불능의 상태, 무릎을 세워 움켜쥐고 머리를 수그렸다. 제드는 늘 그래 왔듯이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던... 그리고 어머니가 이렇게 되기 전의 그때를...
확실한 것은 제드는 두 사람의 손을 잡고 시장을 걷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아버지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다. 단지 그 큰 손의 감촉만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선명한 색채로 눈을 가득 채웠던 시장통의 형형색색의 과일들도 또렷이 기억한다. 추억속의 아버지는 그를 따뜻하게 품어주었고 좋아하는 과일이라면 얼마든지 만져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제드는 가장 좋아하는 붉은색의 작은 복숭아 하나를 조그마한 손으로 쥐어 들어 올려 보였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웃고 있다. 갑자기 온기를 느낀 소년은 그대로 누웠다.
잠시 후 차가운 비가 내렸다. 폐허가 줄지어 늘어선 이 빈민가에 왕래가 잦을리 없었다. 집 앞에 널브러진 죽은 소년을 눈치챌 이 또한 없었다. 제드는 눈을 떴다. 방은 어둡고, 아직 한밤중 인 듯 했다. 공복감 탓일까? 눈은 선명했다. 그러나 기묘한 감각만은 아직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 '차디찬 길바닥에서 잠들어있던' 기묘한 그 감각이 온 몸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이때문인지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처음은 머리에 입은 상처의 통증 때문일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제드는 그것이 도저히 꿈이라고 느낄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실재적이고, 실존적이었다.
기묘한 감각은 그대로 둔 채 서둘러 음식을 찾으려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휘청거리며 음식을 찾아 방을 헤메다 빈 물통이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반사적으로 물을 길어와야만 한다는 생각에, 제드는 어머니가 깨지 않게 통을 들고 조용히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피로감 탓에 똑바로 걷지 못한 제드는 큰 소리를 내며 넘어져 버렸다. 그 바람에 어머니가 눈을 떴다. 잠에서 깬 어머니는 자신의 잠을 방해했다는 분노의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제드쪽으로 다가온다.
"왜 시끄럽게 구는 거야! 또 음식이라도 훔치려 하고 있었군. 이 더러운 도둑 같은 녀석!"
어머니는 넘어져 쓰려져 있는 제드를 마구 짓밟았다.
"쓸모없는 식충이 같으니라고!"
의식이 희미해져 간다. 어머니는 제드를 질질 끌어 문으로 향한다. 제드는 또다시 눈이 내리는 빈민가의 골목에 내던져졌다. 근처에 빛이라곤 없었다. 제드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밖은 여전히 어둡다. 이번엔 자신의 꿈속에서의 감각을 또렷이 생각해 냈다. 같은 밤이었다. 매일 반복되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혼날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왔고, 배고픔을 달래려 어두운 방에 눈을 돌리자 물통이 보였다. 물이라도 마실 생각에 아픈 감각이 남아 욱신거리는 몸을 질질 끌며 통을 향해 간다. 하지만 통 안은 비어 있었다. 힘이 빠져 통의 옆에 앉았다. 한번 더 통을 들여다 본다. 또 한번 빈 통을 바라보자 평소와는 다른 감정이 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분노였다. 빈 통에 대한 분노, 물을 길으러 가야만 하는 것에 대한 분노, 어머니의 폭력에 대한 분노.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듯이 이어져갔다. 심장이 벅차게 뛰면서, 허탈감에 빠져버린다.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진정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방구석의 침대에 곤히 잠든 어머니 옆으로 간다. 심장박동이 그녀에게 들리는 것은 아닐까 내심 불안하다.
이어 깨어난 그녀로부터 돌아오는 폭력과 차디찬 땅바닥의 느낌을 떠올린다. 이 고통스런 환영에서도 전해져 오는 초조감은 제드에게 악의의 동기를 부여했다. 주위를 둘러보다 책상 위에 놓여진 술병을 발견하곤 그것을 집어 들은 제드는 이내 머리 위로 높이 쳐들어 어머니의 머리를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어머니는 기묘한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다시 한번 내리쳤다. 다른 이의 영혼이 제드를 지배하고 있는 듯 했다. 몇 번이나 머리 위로 술병을 내리쳤다.
이윽고 어머니의 숨이 멎었다. 침대는 검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제드는 창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에 눈을 떴다. 비로소 아침이 되었다. 그것도 아주 조용한. 아픔도 허탈감도 없었다. 공복감 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길고 긴 밤이 끝난 듯 했다. 제드는 일어나 찬장에서 빵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그리곤 우선 필요한 것들을 방에서 긁어 모아 봉투에 담았다. 딱 한번, 침대의 검은 얼룩을 확인한 소년은 이내 집을 나섰다. 바깥 세상의 빛은 눈부셔 제대로 볼 순 없었지만, 매우 따뜻했다.
-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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